CULTURE

안녕, 순정만화!

풍선껌을 부는 현겸이 그림이 교실 곳곳에 붙어 있고, 모두가 <꽃보다 남자>를 돌려 보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순정만화가 남긴 파편들은 어쩌면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BYELLE2020.03.04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생각했다.”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에 호명된 봉준호의 수상 소감을 단상 아래에서 들은 스콜세지 감독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날 밤 가장 뭉클한 순간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장면처럼 화려한 무대 위에 올라 직접 헌사를 바칠 수 있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내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은 대상이 있다. 바로 순정만화가들이다. 수많은 만화가가 그려낸 책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나의 세상도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최근 〈아무튼, 순정만화〉라는 책을 썼을 정도다.  
그렇다면 왜 순정만화인가. 생각해 보면 역시나 여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에게는 여자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김진애 박사가 저서 〈여자의 독서〉에 기록한 〈작은 아씨들〉의 감상문을 보자. “‘여자도 씩씩해도 돼. 톰보이라도 오케이야. 그래도 매력적일 수 있어. 남자친구도 생기고 사랑도 해. 훨씬 재미나게 살 수 있어.’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꽤 행복할 수 있었다.” 〈작은 아씨들〉의 자유분방한 둘째 조는 1953년 한국에서 태어난 그에게 그런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역시 1983년 생인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품을 향한 애정에서 출발했으니 여성 서사를 향한 열망은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벡델 테스트’의 잣대를 갖다댈 필요도 없이, 활약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매우 평면적으로 묘사되거나 잘해야 애인이나 조력자에 머무르는 작품이 대다수다. ‘미투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연극과 문학, 영화 장르를 불문하고 남성 창작자들에 대한 회의와 불신도 커졌다. 주인공이 남성일 뿐, 그래도 인간 보편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감했던 수많은 이야기에서 어쩌면 ‘여성’인 나는 대등한  ‘사람’으로 고려조차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낭패감이라니! 피로감이 커져갈 즈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여자, 등장인물의 대부분도 여자, 그 속에서 싸우고 함께 성장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교환하는 것도 여자 캐릭터 일색인 장르의 소중함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지, 바로 순정만화다.
흔히 한국 순정만화의 황금기를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으로 일컫는다. 1988년 창간한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는 그 기점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이후 〈나나〉 〈댕기〉 〈윙크〉 〈이슈〉 〈밍크〉 〈파티〉 〈케이크〉 〈슈가〉 〈오후〉 등 수많은 순정만화잡지가 생겨나고 사라지던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내 성장기를 관통했다. IMF 이후 비교적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했던 만화 대여점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1998년 일본 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되면서 수많은 일본 만화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랬다. 정말 그런 때가 있었다. 강경옥과 신일숙, 한승원과 이미라의 이름을 모두가 알고, 아이돌 멤버 외우듯 ‘재활용밴드’의 프로필을 외우며, 〈NANA〉에 나오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을 선망하던 시절이. 캡틴 마블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의 소녀들에게는 우주 최강의 전사 ‘세일러문 네오 퀸 세레니티’와 동료 세일러 전사들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조차 어느덧 아득한 과거가 돼버린 지금 한국의 순정만화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이 그 시절이 닫혀버린 것처럼 종종 말한다. 그러나 지금도 순정만화의 명맥을 잇는 작가들이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무엇보다 그토록 많은 이의 10~20대를 지배했던 이야기들이 정말 그렇게 쉽게 증발해 버리는 것이 가능할까? 10여 년에 달하는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 친구도, 동생도, 선배 언니도, 심지어 우리 엄마까지 만화를 읽고 있었는데…. 더 이상 예전만큼 거론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또한 그 시절을 없었던 취급을 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아무튼, 순정만화〉 순정만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젊은 여성 작가들이 그려낸 세상은 그 시절 소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순정만화에 대한 이야기이자 8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의 보편적 성장기이기도 하다. 코난북스 펴냄.  
 
나는 순정만화로 사랑을 배웠다. 10대 주인공들이 1인칭 독백으로 쏟아내는 애틋한 감정은 내가 연애나 사랑에 덜 회의적인 어른이 되도록 만들어줬다. 사춘기 시절에 맞은 관계를 향한 열망과 거리감, 다채로운 감정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해준 건 〈쿨핫〉(유시진)의 공이 크다. 〈호텔 아프리카〉(박희정)를 읽으며 미국 중서부 외곽에 자리한 작은 호텔을 드나들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짐작했고, 〈비비 아이리스〉(김강원)를 읽으며 가본 적도 없는 남부 프로방스를 상상했다.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도통 인기가 없던 평범한 모범생 여자애도, 권교정의 만화 속에서라면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김혜린과 신일숙, 임주연의 만화에서 모험과 시련, 동료애는 모두 여자들의 것이었다. 스스로를 독려하기 위해 귀를 뚫고, 교복 스카프를 딸기색으로 물들인 〈내 남자친구 이야기〉(야자와 아이)의 미카코처럼 멋을 부리고 싶었고, 〈Girls!〉(이빈)와 〈다정다감〉(박은아) 속에 나오는 끈끈한 우정이 내게도 찾아오길 바랐다. 그 어떤 예능도 〈노다메 칸타빌레〉(니노미야 토모코)나 김정은의 만화처럼 웃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엄청난 이야기들을 그려내던 당시의 순정만화가들 또한 대부분 20대이거나 30대의 젊은 여성 작가였다는 점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이렇다 할 롤 모델도 없이 자란 내게 만화가들은 자신의 명확한 취향과 직업을 가진, 프로페셔널한 커리어 우먼의 표상이기도 했다. 일도, 사랑도, 패션도, 유머 감각도,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세상의 모든 것에 순정만화가 닿아 있는 셈이다.
지나고 보니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식의 회고를 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 시절, 열심히 자신들의 세상을 나눠줬던 작가들에게 당시 소녀들이 충분히 인사를 고했는지 돌이켜보면 무겁게 고개를 젓게 된다. 만화를 향한 애정은 대학교에 가거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예고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대여점에서 빌린 만화를 돌려 보는 게 정작 창작자들의 생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도, 세상도 창작자의 권리나 소비자의 의무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녀는 영원히 소녀로 머물지 않는다 했던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응원하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던 10대 소녀들은 이제는 e북으로 재출간된 책들이나 애장판을 부지런히 구입하는 구매력 있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비교적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지켰던 누군가는 그 시절을 호명하는 글을 쓰는 ‘성공한 덕후’가 되기도 한다. 책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장 행복한 것은 그 시절을 시차를 두고 공유했던 사람들의 쏟아지는 경험담을 듣는 것이다. 몇몇 작품과 장면들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생겨나는 공감대, 어떤 작가나 작품 이야기가 빠져서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역시나 이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 그 시절의 파편이 내 안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증언을 듣는 것 같아 기쁘고 또 슬퍼진다.
한국 순정만화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천계영 작가는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제작된 〈좋아하는 울리는〉의 시즌 2를 작업 중이다.  손가락 퇴행성 관절염으로 예전처럼 펜을 잡지 못하게 되자 음성 인식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작가의 SNS 계정에 얼마 전 〈오디션〉 1화의 표지가 올라왔다. ‘재활용밴드’ 멤버들이 아닌 또 다른 주인공, 박부옥과 송명자 두 사람의 스케치와 함께 올라온 글은 다음과 같다. “이 표지 그릴 때 아직도 생각나요. 그래, 이 만화는 여자 둘로 시작하는 거야. 멋진 여자 둘로!” 순정만화를 다시 펼치면 그때는 미처 소중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젊고 재능이 넘쳤던 여성 작가들이 뿌려놓은, 그 반짝이는 조각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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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사진 우창원
  • 디자인 오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