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엘르〉가 초대한 7명의 여성. 자기다운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고, 멋진 창조물을 만들며, '나'를 완성해 가는, 멈추지 않는 여자들의 꿈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 두 번째, 최혜영의 용기.

크림 컬러의 드레이핑 톱은 Zara.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는 길을 걱정했다. 불편함은 없었는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편히 내려왔다. 나 같은 사람에겐 계단 하나, 턱 하나가 모두 장벽이다.
오늘 의상을 준비하면서 패션의 세계 역시 불친절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성복은 장애인의 체형에 잘 맞지 않는다. 휠체어를 이용하다 보면 팔뚝이 두꺼워지고 배도 나오는데, 이런 니즈를 반영한 옷이 거의 없다. 외국에서는 저신장 장애인, 절단 장애인 등을 위한 의류를 많이 볼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 유니버설 패션이라고도 한다.
정치계에 들어선 지 한 달 반인데, 어떤 시간이었나 사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전처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바쁘다. 여기에 추가된 게 있다면 정치 공부? 아직 정식으로 시작한 게 없어서 뭘 잘했다 못했다 얘기는 못하겠다. 다만 후회하지 않는다. 나 역시 전에는 정치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갖고 있었는데, 당에 들어와 여러 활동을 접하면서 진정으로 하는 분도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스물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척수 장애를 갖게 됐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어떤 과정이 필요했나 아마 중도 장애인들에겐 비슷한 과정이 있을 거다. 거부하고 회피했다가 나중에는 우울증도 오게 되고, 마지막에는 ‘에이, 모르겠다’ 하고 수용하는 과정. 내게도 그런 과정이 필요했고, 지금은 장애가 있다는 것도 잊고 산다. 상담하거나 주변을 보면 10년, 20년 걸리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 칩거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사고 이후에도 원래의 삶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그런 시스템은 마련돼 있지 않다. 차차 바뀌어야 한다.
사회에 나왔을 때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이었나 정작 내 신체적 장애는 별것 아닌데, 사회에 나와서 부딪히는 장벽이 더 컸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부정적이거나 동정 어린 시선들. 가야 하는데 못 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물리적 장벽들. 취업하고 싶은데 면접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 우리나라에도 장애인 복지란 게 있을 텐데, 왜 나한텐 아무것도 없지?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내가 한번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그런 강인한 의지와 긍정성은 어디서 나왔을까 본래 성향 자체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환경적으로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리고 발레라는 게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운동이다. 그렇게 힘든 발레도 했는데 장애쯤 못 이길까,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전에는 몰랐는데, 나보고 ‘자기애’가 강한 편이라고 하더라. 나를 사랑하고 자신을 믿었던 힘이 내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강연을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 계기는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까 고민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 말하는 것이더라. 원래 말하는 걸 좋아했다. 부모님 말씀이 아이 때부터 재잘거렸다고 하더라. 소통 능력은 아마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장애 이전의 감정과 장애 이후의 감정을 모두 아니까. 둘 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잘 모른다.
2009년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를 설립하게 된 건 중증 장애인 10명과 함께 뜻을 모아 시작했다. 장애인을 향한 부정적 시선과 장벽을 당사자인 우리가 먼저 바꿔보자는 취지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나가고 싶었다. 올해로 11년 차인데, 현재 전국에 활동하는 강사가 50명 가까이 된다. 모두 장애인으로, 이 일을 통해 직업을 갖고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제안받았을 때 얼마나 고민했나 처음에는 놀랐다. 정치라는 걸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데 내가 원래 어떤 기회나 제안이 왔을 때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타입이 아니다. 또 중요한 건 남편이 매우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정치를 한다고 하면 집에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우리 가족은 하라고 떠밀더라(웃음).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친언니의 헌신에 대한 고마움을 자주 언급하던데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다 보니 부모님이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써줄 수 없었다. 특히 무용은 돈이 많이 들지 않나. 언니가 본인이 못한 걸 동생이라도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뒷바라지를 많이 해줬다. 이렇게 내가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것도 가족의 지지 덕분인 것 같다. 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그 한마디.
여성 장애인이 겪는 성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여성 임원, 장애인 직원을 몇 퍼센트 뽑아야 한다는 법은 있지만, 그 안에 ‘여성 장애인’을 몇 명 뽑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현실에서 여성과 남성 간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성 장애인들도 힘들고 차별받는 부분이 있다. 이를 개선하는 게 내 역할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엄마가 되고 싶은 여성 장애인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어려움. 장애가 있는데 무슨 출산을 하느냐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다. 장애인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거다.
장애인의 삶이나 입장에 관심 갖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창작물은 〈언터처블: 1%의 우정〉을 재미있게 봤다. 영화 속 두 사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넘어 그냥 진정한 친구가 되지 않나. 그 영화를 보면 장애인도 편하게 대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아는 강사 중에 안면 장애를 지닌 친구가 있는데, 일하는 모습이나 가족과 보내는 소소한 일상을 유튜브에 올리더라. 인식 개선이 특별한 게 아니라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처음에는 낯설어도 서로 만나 얘기하면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서로 계속 접하게 되면 뭔가 바뀌지 않을까.
본인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뮤지컬 무대에 서기도 했다. 어떤 경험이었나 당시에는 수많은 감정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무대에 섰을 때의 짜릿함이다. 솔직히 사고 이후 무대에 서는 걸 포기했는데, 막상 올라가니 달라진 건 없더라. 조명도 있고, 관객도 있고, 나도 있고. 단지 내 마음이 달라졌던 거다. 원래 내가 좀 무대 체질이다.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발표하는 날, 문이 열리면서 내가 휠체어를 타고 나오니까 거기 있는 기자들이 다 놀라더라.
본인의 존재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사고 이후 누군가를 보고 따를 만한 롤 모델이 없었다. 만일 그런 존재가 있었다면 재활 시간을 좀 더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비록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나를 벤치마킹해서 장애를 지닌 다른 누군가가 좀 더 빨리 사회에 나올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정책이 있나 이 자리에서 장애인의 출산과 육아, 사회복지 시스템, 인식 개선 등 몇 가지를 언급했는데, 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현장에서 시급한 게 뭔지 파악한 뒤 하나씩 해나가야 할 것 같다. 정치 활동을 결심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뭘까 생각해 봤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살아가는 분들을 살피고,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것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다짐해 본다.
아직 도전해 보지 못한 일 중에 해보고 싶은 것 휠체어와 상관없이 나는 계속 나 자신을 위한 도전을 이어왔다. 한번은 스웨덴 국회의사당을 방문한 적 있는데, 거기서 한 여성 국회의원이 아이를 안고 의정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내가 만약 도전을 한다면 엄마로서 아이를 안고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고 싶다.
또 하나의 상징적 장면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국회에는 휠체어 경사로가 잘되어 있나 있긴 있다. 그런데 경사가 너무 가파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