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여자의 미래다 _ 엘르 보이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이지은 작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자'가 아닌 인간이기를 강렬히 갈망하게 된 지금 20대 여성들에겐 어떤 미래가 있을까.


“야, 구하라 뉴스 이거 뭐니?” 친구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막연히 걱정했던,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저 일어나지 않기만 바랐던 일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죽음에 일상이 멈춰버리는 경험에 대해 남자들은 얼마나 공감할까, 나는 가끔 궁금하다. 안다고 생각했던 여성의 죽음 혹은 사회면 기사 속 이니셜로 마주했지만 내가 늘 두려워하는 고통을 겪었을 여성의 죽음이 갑자기 내 삶에 던져지는 순간, 적어도 그날 하루는 무너져버린다. 화를 내고 슬퍼하고 추모하며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술을 마시고 잠든다. 그 여성을 죽게 만든 자들과 이 세상을 미워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채로.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다시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올겨울은 내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두 명의 20대 한국 여성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많은 배우와 함께 일해 온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를 취재한 적 있다. 남성 배우보다 훨씬 악의적이고 집요한 댓글에 시달리고, 괜찮은 캐릭터를 만날 기회가 드물며, 나이를 먹으면 시장에서 밀려날 것을 두려워하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 처한 환경에 대해 그는 말했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배우라도 계속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아, 부질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어떤 작품에서 연기를 잘해도 다음에 주어지는 캐릭터가 너무 한정적이잖아요. 여자니까 무조건 예뻐야 하고 남자친구한테 잘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기 힘들죠. 그래서 캐릭터 인지도가 높고 시청률이 잘 나와도 허무하죠. 무엇을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할지, 동기부여가 안 되잖아요.” 당시 나는 그의 이야기가 연기는 물론 K팝을 포함한 모든 장르의 여성 연예인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리와 구하라의 ‘사회적 타살‘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죽음을 잇달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그냥 20대 한국 여성의 삶이 아닐까?

과연 지금 한국의 20대 여성은 살아야 할 동기, 더 잘 살고 싶다는 목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대학은 ‘단톡방 성희롱’의 공간이고, 남성과의 연애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성적인 촬영물 유포나 데이트 폭력의 위험이 따른다. 시험 점수가 높아도 여자라는 이유로 취업에 실패하고, 어렵게 성공하더라도 승진에 불이익을 겪거나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있으며, 피해에 대응하려면 조직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지난여름, 수십만 명의 여성이 서울 한복판에 모여 불법 촬영 근절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음에도 가해자 처벌은 여전히 솜방망이 수준이라 실형을 사는 비율은 7%에 불과하다. 사법부가 남자들의 창창한 미래와 가정을 지켜주는 사이 여성들은 아프거나 죽어간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올해 발간한 ‘온라인 성폭력 피해실태 및 피해자 보호 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0명의 조사 대상 중 디지털 성폭력(촬영, 유포 협박, 유포·재유포) 피해자는 324명, 20대가 38.6%로 가장 많았다. 이들 가운데 30~40%가 자살에 대해 생각하거나 계획했고, 일부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과하며 ‘여자‘가 아닌 인간이기를 강렬히 갈망하게 된 이 세대에게 한국 사회는 제대로 응답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한참 전 20대를 지난 여성으로서, 그러니까 이제 ‘한국 사회’라는 두꺼운 벽의 일부에 가까워진 기성세대로서 나는 종종 죄책감과 부끄러움, 책임감을 느낀다. ‘20대 남성’의 목소리를 그토록 열심히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언론에서 ‘20대 여성’이라는 존재를 그만큼 깊게 탐구하지 않는 것을 보며 씁쓸해 하기도 한다. 턱없이 부족한 정책과 정치에 분노하다 무력감을 느끼는 날도 많다. 하지만 다시 두 명의 20대 여성을 생각한다. 구하라는 전 남자친구 최종범이 가한 폭행과 비동의 성적 촬영물 유포 협박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정준영 단톡방’ 사건의 진실 규명을 도왔다. 설리는 비록 세상에 없지만, 올겨울 그의 이름으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과 여성들에게 9만 팩가량의 생리대가 기부될 예정이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용기와 존엄을 잃지 않았고, 떠난 뒤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러니 나 역시 오래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지금 살아 있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여성으로서.

Writer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책 〈괜찮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이지은 작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자'가 아닌 인간이기를 강렬히 갈망하게 된 지금 20대 여성들에겐 어떤 미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