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러시아만큼 춥다는 한국의 겨울, 이 잔인한(!) 계절에 온전히 살아남으려면 솜이불처럼 든든한 외투가 필수다. 덕분에 온몸을 감싸는 롱 패딩의 인기가 전국을 휩쓸며 없어서는 안 될 ‘생존템’으로 불티나게 팔렸는데, 롱 패딩의 투박하고 단순한 모양새는 한겨울에도 스타일에 목숨 거는 이에겐 많은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불처럼 둔탁한 디자인과 무채색의 롱 패딩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이들을 위한 희소식이 있으니! 스타일리시한 외모는 물론 탁월한 보온성까지 갖춘 ‘뽀글이’ 혹은 ‘후리스’라고 불리는 플리스 아우터웨어가 새로운 트렌디 아이템으로 떠오르며 유행 궤도에 진입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언뜻 양털처럼 보이지만 플리스는 ‘폴리에스터 소재 표면에 양털처럼 파일(Pile)이 일어나도록 만든 가볍고 따듯한 직물’을 뜻하며, 1980년대 초 미국 원단 회사 몰덴 밀스가 탄생시킨 퍼 라이크(Fur-Like) 소재로 이후 스포츠웨어 시장에 진출해 아웃도어 웨어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말하자면 등산과 하이킹을 즐기는 ‘아저씨’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할까(평소 플리스를 즐겨 입는 샤이아 라보프의 스타일을 떠올리길). 그러나 새로운 유행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우리를 매혹시키는 법. 투박하고 평범한 아이템에 ‘쿨’한 심폐 소생을 즐기는 패션 피플 덕에 플리스가 당당히 하이패션에 진출하며 유행을 주도하고 있다. “어릴 땐 어머니가 입혀주시던 플리스가 정말 싫었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플리스의 숨은 매력에 눈뜨게 됐죠. 가볍고 따듯한 데다, 특유의 귀엽고 포근한 매력이 있거든요.” 디자이너 샌디 리앙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플리스 마니아로,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컬렉션에는 플리스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샌디 리앙의 플리스 룩은 그야말로 다채로운데, 달콤한 솜사탕 컬러를 입힌 재킷부터 데님과 가죽, 형광 라이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아우터웨어를 선보여 큰 성공을 거뒀다. 한편 이번 시즌 런웨이에 다양한 플리스 룩을 선보인 디자이너들의 시도도 눈에 띈다. 등장부터 ‘대박 조짐’을 보인 샤넬의 레드 플리스 톱, 롱스커트와 매치해 포멀한 드레스업 스타일을 완성한 3.1 필립 림, 다양한 컬러를 조합한 코치의 아우터웨어 등등…. 이렇듯 플리스가 올겨울 트렌드에 안착하게 된 건 패딩만큼 뛰어난 보온성과 가벼운 무게, 폭넓은 디자인을 모두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올겨울 아우터웨어 시장은 가히 ‘열풍’이라 할 만큼 플리스가 북새통을 이루는데, 지난해 롱 패딩 판매에 열을 올렸던 각종 스포츠웨어와 캐주얼 브랜드들이 앞다퉈 플리스 아우터웨어를 주력 제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매서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해 줄 보온성과 폭넓은 디자인 외에도 올겨울 플리스를 애용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또 있다. 많은 브랜드에서 출시 중인 플리스가 요즘 패션계의 화두인 ‘에코 패션’의 흐름에 맞춰 윤리적인 친환경 방식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구스와 오리, 양 등 동물에게서 원재료를 채취하지 않는 점이 뚜렷한 특징이며 파타고니아와 노스페이스, 블랙야크를 비롯한 브랜드가 플라스틱 등의 폐기물에서 섬유를 추출해 플리스를 만들어 생태계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가볍고 따듯한 데다가 지구 보호에 동참할 수 있다니!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 손가락질받던 패션계가 플리스에 구원의 손길을 뻗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매력을 장착한 플리스 아우터웨어는 올겨울을 향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이템으로 거듭났다. 단순한 겨울 외투의 가치를 넘어 모처럼 긍정적 기분으로 즐길 수 있는 플리스 트렌드에 동참해 그 온기를 느껴보는 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