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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옷장 정리를 하다가 머플러를 하나 발견했다. 푸른빛이 도는 네이비 컬러의 캐시미어 100% 머플러. 앞면에는 줄무늬가, 뒷면에는 도트 무늬가 그려진 폴 스미스 제품이었다.
아마도 2012년이었을 것이다. 런던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 면세점에서 이것을 샀다. (당시) 남자친구를 위한 이 머플러는 결혼 전 마지막 선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위한 폴 스미스 제품을 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선물이라면, 연인에게 건네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말쑥한 슈트 차림에 꽃무늬 셔츠와 색색의 줄무늬 양말을 매치하는 영국 할아버지의 브랜드 제품은 꼭 한번 연인에게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었다. 그건 내게 일종의 로망이었다.

Ⓒ 게티이미지
폴 스미스를 이야기하려면 그의 독특한 이력을 먼저 말해야 한다. 1946년, 영국 노팅엄에서 태어난 그는 15세에 이미 학교를 떠나 의류 창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사이클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 달리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던 소년은 불행히도 17세에 큰 사고를 당했고,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몇십 년 뒤, 그는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 주니어 라인, 홈 컬렉션과 액세서리 컬렉션을 선보이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었다. 오렌지와 블루, 레드 등의 컬러로 구성된 멀티 스트라이프(Multi-stripe)의 대명사가 되었고, ‘위트 있는 클래식(Classic with twist)’이라는는 말로 표현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었다. 불행한 사고를 당했던 날로부터 그 ‘몇십 년’의 세월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게티이미지
6개월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후 노팅엄의 펍에서 만난 미술 대학교 학생들과의 교류, 영국 왕립 예술대학교(Royal College of Art) 출신으로, 그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아내 폴린 데니어(Pauline Denyer)와의 만남, 청년 혁명과 반문화의 물결이 넘실거리던 6~70년대의 사회 분위기, 젊고 도시적인 동시에 개성 있는 스타일을 원하던 80년대 여피(Yuppie)들의 자기표현 욕구 같은 것이 모두 모여 이루어낸 기적 같은 것일까? 커다란 재능과 창조적인 사업 수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 그리고 약간의 행운 같은 것이었을까?
평일에 생계를 위한 일을 하느라 주말에만 문을 열던 0.9평짜리 작은 부티크, 파리의 작은 방에 옷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열었던 첫 파리 컬렉션 등, 노신사의 지난 이야기들은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 게티이미지
하이패션과 포멀 웨어, 클래식과 위트, 점잖은 신사와 반항하는 어린이. 두 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는 폴 스미스의 물건은 내게 하나의 메시지와 다름없었다. 칙칙해지지 말자고, 시들지 말자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갈아 넣지 말자고, 그렇게 나쁘게 소진되지 말자고. 타성에 젖지 말고 편견에 갇히지도 말자고. 호기심과 용기와 유머 같은 것들을 잃지 않고, 날마다 생을 긍정하면서. 그렇게 살자는 메시지였다. 짝꿍으로 점찍은 이에게 건네는 이 메시지는 동시에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렇다. 어떤 물건에는 자신이 꿈꾸는 삶의 태도가 담기기도 한다. 새해, 머플러 하나를 꺼내 들고 이토록 수다가 길어진 것은 그런 까닭이다. ♡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