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필립 델롬
이 책은 샤넬 하우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업 과정 또한 방대했을 것 같다 총 300여 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쉬지 않고 5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말 그대로 프랑스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있는 샤넬 하우스와 관계된 여러 장소와 아틀리에, 패션쇼를 직접 방문했다. 내가 본 현장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했다.
샤넬의 수많은 공방을 여행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이렇게 말하면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어디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플리츠를 만드는 로뇽 아틀리에. 마분지를 이용해서 패브릭의 주름 형태를 만들어내는 건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랄까, 추상적인 조각 작품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그 외에도 각각의 아틀리에에서 만났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눈에 담은 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신경 썼나 패션쇼나 옷의 디테일이 잘 나타나야 하는 그림들은 과슈(고무 수채화법)로, 아틀리에나 백스테이지 풍경은 좀 더 가볍고 빨리 표현할 수 있는 색연필로 그렸다. 한 가지 방법으로만 그렸다면 조금 지겹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모르는 샤넬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수없이 많다.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담고 싶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한 브랜드의 창조성과 연결된 모든 곳을 속속들이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작업이 본인에게 영향을 미친 게 있나 사람들이 흔히 패션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광고나 셀러브리티들의 화려하고 글래머러스한 모습으로 대변되곤 한다. 그 이면에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좀 더 아름답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이 책에서 보여준다는 점이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아틀리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하고 겸손하지만, 그들이 가진 기술과 일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하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크게 와닿은 부분이다.
2019년 2월 19일, 칼 라거펠트의 타계 소식이 전 세계 매스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당신에게 이 소식은 어떤 의미였나 이 책을 만드는 동안 여러 차례 칼 라거펠트와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가 내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작업하면서 때때로 ‘그가 맘에 들어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에게는 동기부여가 되는, 자신의 실력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 담긴 그림에서 칼은 그런 존재였다. 칼은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유머러스한 동시에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건 굉장히 슬픈 소식이다.
책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칼의 또 다른 면모가 있는지 궁금하다 칼 라거펠트는 직접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아마 지금 시대에는 몇 되지 않을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곳곳의 아틀리에를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게 칼의 드로잉이었다. 그게 가방이든 신발이든, 모든 사람이 칼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드로잉에는 그야말로 모든 디테일이 세심하게 표현돼 있어 이를 바탕으로 아틀리에 사람들은 바느질하고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이전부터 그가 굉장한 디자이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술을 제대로 이해한, 그림을 그린다는 게 무언지 알고 있는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새롭게 실감했다.
2018년 〈르 코르뷔지에: 빌라 사보아의 찬란한 시간들〉이라는 책과 동명의 전시를 통해 한국 팬과 만났다. 이 책은 르 코르뷔지에가 1929년에 지은 주택 빌라 사보아에 대한 이야기다. 자료가 소실된 가운데 상상으로 그려낸 당신의 그림 덕분에 빌라 사보아를 직접 보러 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생겼다 안 그래도 SNS를 통해 한국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이 책에 관심을 가져준 걸 알 수 있었다. 글쎄, 사실 그림을 그리면서 그 장소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길 바라면서 그린 적은 없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장소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웃음). 하지만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마음은 분명하다.
당신의 그림은 본인의 생각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직접 쓰고 그린 〈언노운 힙스터 다이어리 The Unknown Hipster Diaries〉나 〈아티스트 인스타그램 Artists’ Instagrams〉을 보면 당신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일러스트레이터인지 알 수 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단순히 그림만 그렸으나,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을 함께 담고 싶었다. 1989년에는 당시 유행이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을 주제로 짧은 글과 그림을 연재했는데, 이를 통해 그림으로 표현되는 상황을 글로 설명하는 게 꽤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꾸준하게 짧든 길든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주 짧은 글을 읽는 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더라. 아쉬운 일이다.
최근 프랑스에서 출간된 〈클라스 에고 Classe Ego〉는 어떤 작품인가 길거리나 주변에서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지 않나. 나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와 불편한 상황을 꼬집되 너무 심각하지 않게,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웃음이 부족하고 얼굴 찌푸릴 일만 잔뜩 쌓여 있으니 말이다.
2020년에는 갤러리 페로탕과 그림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고 오는 3월에 시작될 전시로,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 지금까지 내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나름의 내레이션을 통해 표현한 거라면, 화가로서 이번에 선보일 작품은 관람객들이 자신을 잊고 그림 속으로 젖어들길 바란다.
‘장-필립 델롬을 알려면 이것을 보라’고 손꼽을 만한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글쎄, 지금 든 생각으로는 〈아티스트 인스타그램〉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오늘의 시대와 가장 근접하니까 오늘의 나와도 가장 근접하지 않을지. 개인적으로 한국을 아직 잘 알지 못하지만, 먼저 펴낸 책 〈르 코르뷔지에: 빌라 사보아의 찬란한 시간들〉과 전시를 통해 한국인이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