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저물고 있다. 2019년의 마지막 ‘요주의 물건’을 선택하기 위한 고민이 길었다. 이 글이 업로드되는 크리스마스에 입기에 좋고, 〈엘르〉와도 잘 어울리고, 좋은 메시지도 담긴 물건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 〈엘르〉가 올 한해 말한 것 중 내 맘에 오래 남은 건 바로 ‘엘르 보이스’ 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는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엘르〉야말로 지금 동시대 여성들의 고민과 갈증, 용기, 힘, 연대를 말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의 물건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인지 고민했다. 너무 까다로운 조건인가 하고 절망하던 중 하나의 물건이 퍼뜩 떠올랐다. 연말, 파티, 엘르, 여성, 메시지! 그것은 바로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랩 드레스였다.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 앞에서, 다이앤본 퍼스텐버그. 1987년. @게티이미지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와 당시 남편 바론 에곤 본 퍼스텐버그. 1970년. @게티이미지
올해로 탄생 45주년을 맞은 랩 드레스는 세상에 처음 등장하자마자 주목받았다. 볼드한 패턴과 컬러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단추나 지퍼와 같은 잠금장치 없이 몸에 휘감아 입는 방식 또한 새로웠다. 자유롭고 아름답고 편안한 랩 드레스는 당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랩 드레스가 처음 선보이고 2년 뒤인 1976년, 랩 드레스를 입은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모습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시빌 셰퍼드. 1976년. @mdb.com

영화 〈아메리칸 허슬〉의 에이미 아담스. 2013년. @mdb.com

영화 〈세상을 바꾼변호인〉의 펠리시티 존스. 2018년. @mdb.com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을 지낸 루스 바더 긴스버그는 법조인 경력의 상당 부분을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 힘썼다. 1970년에는 여성의 권리를 다룬 첫 법 학술지 ‘여성 권리 법 리포터’를 공동 창간했고,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첫 여성 종신교수로 재직하며 성차별에 관한 사상 첫 법학대학원 판례집을 공동 집필했다. 1972년, 미국 시민 자유 연맹의 여성 권익 프로젝트를 공동 창립했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프로젝트의 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6개의 성차별 소송을 이끌었으며 그중 5개를 승소했다.
긴스버그는 수많은 성차별법 중에서 영향력이 큰 것들을 특정한 후 각각의 소송을 승소로 이끄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종종 남성 소송인을 선택하기도 했는데, 성차별이 남녀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남성 보육자 관련 사건을 다룬다. 보육 및 간병인 세금 공제 혜택이 여성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불이익을 받은 남성을 위한 변호였다. 겉으로는 여성을 돕는 법 같지만, 사실 여성들은 당연히 남성들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법의 이중성을 경계한 것이다. 성차별의 근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합법적 차별을 부술 수 있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영화 속에서 펠리시티 존스가 판사를 향해 외친다. “이건 특권이 아니에요. 이건 새장이고 이 법들이 쇠창살이에요!” 차별의 벽을 완전히 부수겠다는 선전포고의 장면에서 그녀는 왜 DvF의 랩 드레스를 입었을까. 프로답게 보여야 할 장면에서 남성복을 닮은 슈트를 입어야 한다는 편견을 부순 장면은 아닐까. 단호하고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진정한 혁명가를 표현하기에 랩 드레스보다 좋은 옷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youtube@ CollegeHu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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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뿐 아니라 오프라 윈프리, 케이트 미들턴, 미란다 커 등이 Dvf 랩 드레스를 즐겨 입지만, 내 기억 속의 모든 장면을 통틀어 가장 강렬했던 건 바로 미셸 오바마가 Dvf 랩 드레스를 입고 랩 하는 영상이었다. 2013년, 아동 비만 퇴치를 위한 캠페인에서 춤을 추던 그녀가 2015년에는 십 대들에게 고등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Better make room’ 캠페인의 목적으로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어정쩡하게 서서 팔을 양쪽으로 휘저으며 SNL 코미디언 제이 파라오와 함께 ‘폭풍 랩’을 선보일 때 그녀는 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생각에 잠겼다. 흑인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지만, 법대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고, 훗날 퍼스트레이디가 된 사람. 그런 사람이 십 대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건 어떤 의미일까. 흑인과 여성, 아동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워 온 그녀가 말하는 교육의 중요성이란, 희망 그 자체가 아닐까.
다시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를 생각한다. ‘이 브랜드는 여성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던 사람. ‘내가 가장 자유로울 때 가장 나답다’는 지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디자이너. 동시대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비영리단체의 여성 대표들을 후원하기 위해 ‘DVF 어워즈’를 설립한 기업가. 그녀가 발명한 랩 드레스에 관하여 나는 ‘섹시한’이나 ‘여성스러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독립적이고 단호하고 강인한, 약한 이들을 위해 싸우는, 옳지 않은 것들과 투쟁하는 여성들. 그들을 옷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드레스의 모습일 테니까. ♡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