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2주 전 어느 날 오후. 2박 3일 짧은 여행 짐을 싸다가 절망했다. 빼도 빼도 더 쌓이기만 하는 물건들을 앞에 두고, 나는 드레스룸에 주저앉아 듣는 이 없는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많아도 너무 많잖아, 이건 미니멀하게 살기로 했던 나의 결심에 반하는 것이야, 드라이어랑 롤 빗이 꼭 필요해? 옷을 하루에 두 번씩 갈아입을 거야? 책은 어느 틈에 읽으려고? 차도 두고 갈 건데 이걸 다 어떻게 짊어지고 다닐 셈이야? 이 추위에? 눈이라도 오면? 길이 꽁꽁 얼면?
평소 외출할 때에도 비슷하다. 에코 프렌들리하지 않은 자세로 마구 사들여 한동안 옷장을 장악했던 커다란 에코백들. 그것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하다. 국자로 커다란 국밥 솥을 휘휘 섞듯이 손을 넣어 휘휘 저어야 물건을 찾을 수 있는 그 깊고 아득한 세계. 가죽으로 만든 빅 백은 또 어떤가. 외출하고 두어 시간 지나면 가까운 우체국에 들어가 집까지 택배로 보내고 싶어지는 그 짐짝. 그 구차한 미련들!
그럴 때면 90년대의 언니들이 떠오른다. 캐롤린 베셋 케네디, 케이트 모스, 캐머런 디아즈, 그리고 신디 크로퍼드. 배꼽 보이는 크롭 톱과 오버사이즈 데님, 슬립 드레스 같은 것을 간단하게 걸치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기고 빨간 립스틱만 쓱쓱 바른 맨숭맨숭한 얼굴. 지금 봐도 세상 쿨한 언니들의 스타일의 ‘킥’은 백이었다. 손바닥만 한 백. 어깨에 멘 건지 겨드랑이에 낀 건지 헷갈릴 만큼 짧은 스트랩이 달린 그 핸드백들.




이 같은 형태의 백이라면 자연스럽게 펜디 바게트 백을 떠올리게 된다. 바게트 백은 1997년, 그러니까 펜디가 LVMH에 편입되기 전 가족 중심의 운영을 이어가고 있던 시절에 탄생했다. 액세서리 부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실비아 펜디는 여성들이 더 쉽고 기능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의 백을 원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과시하지 않는 디자인, 형태는 단순하지만, 컬러나 소재, 장식에서 독특함을 더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하던 그녀가 주목한 건 프랑스 여자들이었다. 프랑스 여자들이 빵집을 나설 때 바게트를 팔 아래 끼고 걷는 모습을 떠올렸고, 팔 아래에 꼭 끼게 멜 수 있는 바게트 백을 만들게 된다.
바게트 백은 처음 출시된 후 10여 년 동안 약 1,000가지가 넘는 버전의 디자인이 제작되었고, 약 80만개가 넘는 제품이 판매되었다. 그야말로 90년대의 필수품이었는데, 그건 바게트 백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 특징 때문이었다. 진주, 비즈, 시퀸, 깃털 등으로 장식된 다양한 버전이 수집 욕구를 자극한 것. 마돈나, 줄리아 로버츠, 케이트 블란쳇, 모나코의 캐롤라인 공주, 샬럿 공주 등 많은 유명인이바게트 백을 사랑했지만, 바게트 백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고르라면 역시 사라 제시카 파커,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캐리다.
뉴욕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캐리는 한 남자를 맞닥뜨리게 되고, 그에게 길을 묻는데, 그가 대뜸 권총을 꺼내 들고 “백 내놔!”라고 외친다. 그 순간 강도에게 캐리가 건넨 말. “이건 바게트인데요….”

<섹스 앤드 더 시티> 2019 Ⓒimdb.com
이 놀라운 장면은 올봄 새로운 버전으로 제작되어 공개되기도 했다. 상하이와 홍콩, 뉴욕을 배경으로 촬영한 짧은 필름, 펜디의 #baguettefriendsforever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그중 뉴욕 버전의 영상에는 카타샤라우, 에보니 데이비스, 멜리사 마르티네즈, 카로다울이 등장해 펜디 바게트 백 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미리 봐 둔 보라색 시퀸 버전의 바게트 백을 꼭 손에 넣어야겠다며 매장으로 달려갔지만, 그 백은 조금 전에 다른 이가 구매한 뒤였다. 그 사람을 찾으려 소녀들이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사라 제시카 파커가 등장한다. 강도를 만났던 그 날과 똑같은 보라색 시퀸으로 장식된 바게트를 메고서. 그리고 “난 그 백이 필요해요!”라고 간절히 외치는 소녀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오, 이것은 백이 아니야.” “이건 바게트야!”



“남의 눈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구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등요’!”라고 인터뷰하던(1994년 9월 17일 MBC 뉴스데스크 ‘X세대 신 패션’) 90년대 언니들의 룩이 다시 돌아왔음을 느낀다. 크롭트 톱과 몸에 꼭 맞는 터틀넥 니트, 부츠 컷 팬츠, 투박한 워크 부츠, 그리고 손바닥만 한 미니 백. 어떤 백을 메느냐에 따라 애티튜드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스타일만 돌아온 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태도에 더 주목한다. 점점 더 많은 물건을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을 떨쳐내고, ‘혹시나’로 시작되는 구차한 변명들은 끝내버리고, 아이폰과 립스틱 하나, 선글라스 하나 넣으면 꽉 차는 작은 백을 메고 산뜻하게 집을 나서는 태도를 갖고 싶다. 왜냐면,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을 것 ‘같그등요’!♡

지지 하디드 Ⓒ펜디 제공

매디슨 비어 Ⓒ펜디 제공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