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향한 눈을 가진 네리 옥스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전직 모델에서 MIT미디어 랩의 최연소 교수가 된 그녀가 바라보는 미래. | 네리 옥스먼,모델,교수,여성,커리어

  임신 7개월의 네리 옥스먼(Neri Oxman)이 MIT 대학 강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컴퓨터공학부의 신관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검은 톱과 검은 벨벳 바지, 검은 하이힐을 신고 트레이드마크인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볍게 올려 묶은 채 그녀가 축하 연설을 시작했다. “앞으로는 기계와 같은 인공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인 유기체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될 겁니다. 저 또한 앞으로 한 그루의 나무처럼 알아서 자라나는 건축물을 지을 거예요.” 뜬구름에 가까운 말처럼 들리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미래 건축에 대해 생각해 왔다. 세포간 운동, 특히 자연에서 발견되는 신비한 규칙성인 프렉털 구조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자연의 원리를 디자인과 건축의 핵심 요소로 활용하기를 즐긴다. 그녀가 이끌고 있는 MIT 미디어 랩의 ‘미디에이티드 매터(Mediated Matter)’ 팀에서 이제까지 진행한 연구 목록을 보면 옥스먼의 머릿속에 어떤 세계가 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 어떤 팀보다 독창적인 실험을 많이 하는 것으로 유명한 옥스먼의 연구팀은 생물학과 컴퓨터공학, 디자인과 건축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3D 프린트 기술로 건축물의 뼈대를 출력한 뒤, 누에 6500마리를 풀어 고치를 짓게 한 ‘실크 파빌리온’, 부분별로 밀도와 경도, 탄성도를 다르게 만들어 안전함은 물론 착용감까지 극대화한 특수 헬멧 등이 좋은 예다. 연구팀 디렉터 조이 이토에 의하면 ‘경계를 초월하는 융합적인 사고방식’이 옥스먼의 강점. 그녀의 동료 과학자 대니 힐리스는 “그녀는 인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걸,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깨닫게 될 거예요”라며 그녀의 존재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옥스먼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이뿐만이 아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리스 반 헤르펜은 그녀와 함께 3D 프린트 기술을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봉제선 없이 전체가 하나로 디자인된 옷에 피부 조직에 가까운 유연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얹어 완성시킨 케이프와 스커트로 2013 파리 패션위크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구아호아 1(2018)’ 프로젝트를 위해 제작된 부품들. 주재료인 셀룰로오스와 키토산, 펙틴의 농도에 따라 다양한 색과 경도, 투명도를 띠고 있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가수 비욕을 위해 특별 제작한 마스크. 3D 프린터로 인간의 근육과 골격의 질감을 그대로 재현했다. 방음 의자 전시를 위해 하버드 대학의 연구소를 방문한 네리 옥스먼과 동료 교수인 데이비드 에드워즈. 지난봄, 옥스먼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전시로 또 한 번 과학계와 예술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자주 들었던 히브리 성서의 한 구절 ‘하나님이 땅에게 말씀하시길, 열매를 맺는 나무가 돋아나게 하라, 하시더라’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5m 높이의 파빌리온 ‘이구아호아 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스페인어로 ‘물구멍’이라는 뜻의 이 거대한 구조물은 물, 셀룰로오스와 펙틴, 새우껍질에 많은 키토산 등의 생체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4년 동안 키토산의 농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실험을 거듭한 결과, 그녀는 다채로운 질감과 아름다운 그러데이션 층을 지닌 ‘살아 있는 인공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모든 재료가 완전히 자연 분해되기 때문에 환경적인 가치까지 인정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런 신기술과 관련해 그녀는 조회 수 230만 뷰를 돌파한 2015년 TED 강연에서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에 발목 잡혀 있지만 자연적인 원리를 기술적으로 잘만 활용하면 앞으로 모든 건축물을 재생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힘줘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옥스먼은 지난해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와의 스캔들로 소문의 중심에 서야 했다. 그녀가 개발한 방음 의자에 관심을 가진 브래드 피트가 옥스먼의 연구소를 직접 방문한 것.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피트가 함께 있는 사진이 미국 <위클리>지의 커버를 장식했고 ‘은밀한 사랑의 여행’이라는 유치한 제목을 단 사진은 그날부터 옥스먼의 삶을 끈질기게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제가 열정적인 스타일이긴 하지만 다행히 주변 상황에 크게 동요하는 편은 아니에요”라며 어렵게 입을 뗀 그녀는 “브래드는 굉장히 멋진 사람이자 좋은 친구예요. 물론 가십지를 장식하는 건 힘든 경험이었지만요”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열애설이 터졌을 당시 사실 옥스먼은 헤지펀드 매니저인 빌 애크먼(Bill Ackman)과 이미 일곱 달째 데이트 중이었다. 이제는 남편이 된 빌 역시 매력적인 아내를 둔 탓에 남몰래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전직 모델다운 아름다운 외모도 그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키우는 요소다. 옥스먼은 한 인터뷰에서 외모 때문에 실력이 가려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겠죠”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지만. 옥스먼의 뛰어난 심미안과 미적 감각은 유명한 건축가였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그녀는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하이파의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옥스먼은 일찍이 구름을 관찰하는 법과 꽃을 말리는 법을 터득했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동생 케렌 옥스먼은 무엇보다 언니를 목표 의식이 강했던 소녀로 기억한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상황을 회피하는 법이 없었어요. 호기심도 강했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점을 찾아내는 똑똑한 소녀였죠.” 이후 버스에서 스카우트돼 모델로 일하거나 이스라엘 공군으로 복무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거치며 단단한 여성으로 성장한 그녀는 충분한 자아실현을 할 수 없었던 의대 생활을 과감히 포기하고 뚝심 있게 건축학도로서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남다른 학구열로 이스라엘의 테크니온 공대를 졸업한 후엔 곧바로 런던 AA 스쿨 건축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 “직업윤리가 확고한 학생이었어요. 쉬긴 하는 건지, 스트레스를 받긴 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논문 지도교수였던 마이클 외인스탁의 말이다. 디자인 및 컴퓨터공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MIT 대학에서 34세의 나이로 MIT 미디어 랩의 최연소 교수가 된 네리 옥스먼. 내년 2월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겨우 43세인 그녀의 헌정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그녀가 즐겨 찾는다는 뉴욕 자연사박물관 근처의 한 카페에서 출산예정일이 임박한 옥스먼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방 13개짜리 펜트하우스로 이사하게 됐다며(그녀의 자산은 약 1조300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근황을 전했다. 뉴욕에서 자신의 건축디자인 사무소를 오픈할 것이라는 계획도. 하지만 MIT에서 연구 활동은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이미 3D 프린트 기술을 활용해 멜라닌 색소를 건물 외장재와 결합하는 건축방식을 실험 중이라 했다. “햇빛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태닝되는 건물, 멋지지 않나요?”라며 그녀가 짙은 초록색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아무리 설레는 프로젝트라도 곧 태어날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그녀를 가슴 뛰게 하진 못할 것이다. 임신을 통해 겪게 된 가장 큰 변화를 묻자 수줍은 미소를 띠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까지 어머니라는 단어를 들으면 언제나 자연의 경이로움이 떠올랐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된 제 모습을 상상해요.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그동안 어떻게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일에 대한 열정이 큰 그녀이기에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옥스먼은 다시 연구소로 향할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말이다.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는 동료 과학자 힐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옥스먼이 계속해서 되풀이해 온 것들이 이제는 정말 예측 가능한 미래가 되고 있어요. 그녀의 비전대로, 세상의 모든 건축물은 인공적인 동시에 자연적이고, 건축이 완료된 시점에도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아름다운 생명체로 탈바꿈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