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탄생해 100년의 역사를 눈앞에 둔 구찌에게 ‘과거’란 지나온 시간보다 찬란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창의적인 도구일 것이다. 그 때문일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보여주는 과거와 현재의 믹스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 상상 이상의 결과물로 드러난다. 더 깊이 있고 더 과감하게. 이런 브랜드의 역사와 디자이너의 철학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 위해 구찌는 매년 예술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선택해 컬렉션을 선보여 왔다. 지난 5월 로마에서 열린 2020년 크루즈 쇼도 마찬가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박물관 중 하나인 카피톨리네 미술관(Capitoline Museums)은 1471년 미켈란젤로가 도안하고 260여 년에 걸쳐 완공된 곳으로, 수많은 고대 유물을 배경으로 크루즈 컬렉션이 펼쳐졌다. 미켈레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여성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했던 1970년대까지 실로 광범위한 아카이브를 동시대적 스타일과 그가 전하려는 자유 메시지와 버무려 관객에게 놀라움과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선사했다. 로마시대 의복인 튜닉과 토가, 병사들이 썼던 투구, 골드 장식품을 변형한 볼드한 액세서리는 디자이너가 애정하는 다양한 체크 패턴을 사용한 70년대 레트로 스타일링으로 재탄생했으며, 투피스 혹은 스리피스로 구성된 룩은 팬츠·스커트·블레이저·코트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선보여 패션은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입고 싶은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찬사와 진득한 여운을 남겼던 구찌의 2020년 크루즈 컬렉션이 지난 10월 1일 서울에서 공개됐다. 로마에서 펼쳐진 쇼가 세계 최초의 미술관에서 선보인 것이라면 서울에서 열린 장소 또한 심상치 않다.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상징하는 안국동, 정확하게 계동길에 자리 잡은 카페 어니언(Onion)은 오래된 한옥이기에 앞서 1930년대에 지어진 저택으로 해방 직후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우파 정치운동의 거점으로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로 이뤄진 고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레트로 무드로 무장한 잔나비의 공연으로 파티의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한국의 전통 가옥과 잘 어울리는 구찌의 크루즈 컬렉션.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 흙벽과 대청마루, 대들보와 서까래 등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곳에 구찌의 새로운 마스터피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시간과 공간, 문화를 초월한 채 방문객을 반겨주었다. 마루를 벗어나 닳고 닳은 디딤돌을 내려오면 한옥 곳곳에 배치된 강렬한 색채와 패턴을 입은 아이템을 만날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 컬렉션, 새롭게 선보이는 액세서리 라인까지. 그중에서도 전통 창호 사이에 자리 잡은 새빨간 벨벳 스툴 위에 놓인 화려한 플라워 패턴의 가방들은 고택이 주는 여백미와 담백함과 대비를 이뤄 극도의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탤리언의 대담하고 스타일리시한 손길, 한옥의 고즈넉한 감성이 만나 이뤄진 독특한 무드는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핫’한 셀러브리티들의 참석으로 열기를 더했다. 이동욱, 주지훈, 이성경, 옹성우, 박민영, 레드벨벳 슬기, 김영광 등은 저마다 개성을 살린 구찌 룩을 입고 자리를 빛내주었으며 복고 스타일이 진한 잔나비의 공연으로 한국적이지만 트렌디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후 이어진 디제잉 파티로 한국 전통가옥에서 이뤄진 컬렉션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밤을 선사했다. 고대 로마에서부터 현재의 서울까지,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시작한 유서 깊은 이탤리언 패션 하우스의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은 깊어가는 가을밤, 근대 한국 역사가 숨 쉬는 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많은 이의 마음속에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