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물건] #05. 앤 해서웨이의 그 시계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앤디 워홀과 이브 생 로랑이 사랑했던 시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 받은 시계.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의 정수를 보여 주는 까르띠에 탱크 와치. 그 작은 네모 안에 궁극의 디자인이 담겨 있다. | 요주의 물건,시계,까르띠에 탱크,까르띠에,탱크와치

    오늘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꺼내 볼까. 5년 전 늦봄, 프랑스 칸으로 출장을 떠났다. 칸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는 어느 여배우의 화보를 촬영하기 위한 3박 4일의 일정. 퇴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갔던 출장이었다. 죽음의 스케줄(아아, 5년이나 지났는데 엄살 부리는 이 습관은 어째서 여태 그대로일까!)을 마치고 잠깐 주어진 자유 시간, 나는 칼튼 호텔 방향으로 내달렸다. 목적지는 까르띠에 부티크. 십 년 직장 생활의 종지부를 찍으며, 나는 네모 모양의 작고 아름다운 물건을 손에 넣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한동안 그것을 드레스 룸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어쩐지 은퇴 경기의 마지막 타석에서 친 안타 볼(양심상 홈런볼이라고는 못하겠다)을 기념구로 간직하는 한물간 야구선수의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또 하나 있었다. 경제생활을 공유하는 배우자에게 아직 털어놓지 못한 것이다. 꽤 큰 금액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즉흥적이었던 이 깜짝 쇼핑에 대해.     Ⓒ N. Welsh, Collection Cartier © Cartier   내가 손에 넣은 작고 아름다운 네모. 그것은 까르띠에 탱크 와치다. 탱크 와치는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전쟁 중에 태어났다. 1917년, 루이 까르띠에는 동맹국의 탱크의 모양에서 영감을 얻어 당시로써는 파격에 가까운 디자인을 선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본 탱크의 차체를 닮은 케이스, 탱크 바퀴를 닮은 샤프트. ‘탱크 노멀’이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의 시계는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의 미국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존 퍼싱 장군에게 전해졌다.   이후 1920년대에는 손목에 잘 맞도록 완만한 곡선으로 디자인된 케이스와 길쭉해진 다이얼이 특징인 탱크 상트레, 탱크 쉬누와즈, 탱크 루이 까르띠에, 탱크 아 기쉐가 선보였다. 1930년대, 스포츠 활동을 할 때 시계가 깨지지 않도록 한 탱크 바스퀼랑트와 45도 회전한 독특한 모양의 탱크 오블리크, 그 이후의 탱크 알롱제, 아메리칸, 프랑세즈 등…. 놀라운 건 이 시계들의 디자인이 지금의 탱크 와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사각 프레임과 로만 인덱스, 푸른색 크라운, 브레이슬릿과 케이스가 하나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보이는 이 시계는 단순한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게티이미지    터틀넥 스웨터, 동그란 안경, 작은 카메라 그리고 덥수룩한 백발. 앤디 워홀은 작품뿐 아니라 그 자신도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되는데, 그의 겉모양을 상징하는 물건 중에는 까르띠에 탱크 와치도 있다. 멈춰버린 탱크 시계를 착용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그는 “탱크를 착용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 재클린 케네디,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까뜨린느드뇌브 등이 탱크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imdb.com   탱크 와치는 영화 속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스마트한 공학도(인셉션, 엘렌 페이지)와 순수하고 착한 심성의 칼럼니스트(로맨틱 홀리데이, 케이트 윈슬렛), 불행한 사랑에 빠지고 마는 은행원(더 타운, 레베카 홀), 그리고 몰락한 상류층(블루 재스민, 케이트 블란쳇) 등 다양한 인물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동안 시계가 사회적 지위를 주로 상징했다면, 이 단순한 디자인은 성별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인물에 녹아든다는 점에서 새롭다. 최근 선보인 작품 중에서 시계가 가장 눈에 띄었던 영화는 <인턴>이다. 방영된 직후, 화제가 되었던 앤 해서웨이의 스타일은 영화 <섹스 앤 더 시티2>의 의상 디자인과 스타일링을 맡았던 재클린 오크네이언(Jacqueline Oknaian)의 솜씨다. 쇼핑몰 창업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이라는 성공신화를 쓴 30대 CEO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은 매우 세련된 룩을 선보이는데, 액세서리는 화려한 주얼리를 배제하고 딱 하나, 탱크 와치만 착용한다. 열정적이고 합리적인 젊은 수장의 캐릭터에 ‘찰떡’이었다는 평.     앤 해서웨이, <인턴>, 2015 Ⓒimdb.com   글머리에 털어놓았던 시계 은닉 사건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가 혹시 있으려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숨겨왔던 나의’ 시계는 곧 발각되었다. 어느 날 아침, 늦잠을 자던 내게 다가와 남편이 물었다. 그의 손에는 그가 방금 드레스룸에서 발견한 낯선 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자혜야, 이 탱크 누구 거야? 누가 두고 갔나 봐.” 이틀 전 집에 놀러 와 시끌벅적하게 놀고 갔던 지인 중 하나의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이래저래 내 것이 되었는데 왠지 찜찜해서 감춰두었다는 나의 고백에 그는 한참 동안 웃으며 되레 미안해했다. 그런데 이 스토리에서 중요한 건 결론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그가 “이 시계 누구 거야?” 묻지 않고 “이 탱크 누구 거야?”라고 물었다는 것. 그 순간, 나는 그것을 나만의 ‘기념구’로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탱크는 시계가 아니다. 탱크는 탱크다.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