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캐멀 코트인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사실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한 번마 걸쳐보면 당신도 알 것이다. 왜 하필 캐멀 코트인지, 왜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지.:: 막스마라, 캐멀, 코트, 커리어 우먼, 엘르. elle.co.kr:: | :: 막스마라,캐멀,코트,커리어 우먼,엘르. elle.co.kr::

전통적인 캐멀 코트를 트렌드와 과감하게 접목한 이번 시즌 ‘신상’ 들은 좋은 눈요기지만 지름신의 전령은 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 쇼핑 리스트 맨꼭대기를 차지한 것은 역시 막스마라다. 버튼 네 개가 일자로 달리고 허리가 살짝 들어간 2009년 버전이다.클래식은 죽지 않는다, 다만 잠시 소수의 품에 머물다가 다시 대중에게로 복귀할 뿐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트렌디 클래식.’ 얼핏 로또 추첨기에서 튀어나온 단어들을 배합한 건가 싶지만 명실상부 21세기 유행 법칙 제1조로 등극한 말이다. 이번 시즌 트렌디 클래식으로 지목된 아이템은 바로 캐멀 코트다. 2009 F/W 컬렉션을 보면 그것 없이 여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온통 캐멀, 캐멀, 캐멀 열풍이다. “90년대 막스마라 캐멀 코트는 커리어 우먼의 상징이었고, 때문에 대학생들의 로망이기도 했지. 재미있는 건 그 이후 한 번도 캐멀 코트 유행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야. 모피와 가죽도 꾸준히 리바이벌되고, 하다못해 패딩조차 왔다 가고! 패션 테러의 시기라 불리는 1980년대도 꾸준히 오마주되는데 캐멀 코트의 귀환은 이번이 처음이야. 단순히 캐멀 색상 코트가 아니라, 막스마라 특유의 커리어 우먼 같은 스타일은 더더욱.” 캐멀 코트의 전성기를 반추하며 편집장은 막스마라 캐시미어 코트에 휩싸인 듯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새삼스럽긴 하다. 80년대를 풍미한 스키니 진이나 ‘돌청’이 한참 만에 돌아온 건 워낙 대대적으로 유행해 식상해서 그렇다 치자. 누가 봐도 “저건 철 지난 유행이야!”라는 건 클래식하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니까. 그런데 캐멀 코트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트렌드의 권좌에서 쫓겨나야 했던 걸까? 강남 사립학교 겨울 교복으로 맹활약을 펼치는 사촌동생인 캐멀 더플 코트가 해코지라도 했나(“캐멀은 교복 같아서 싫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내내 중동 사막에서 펼쳐진 석유전쟁과는 무슨 관계일까(“모래 색은 군복 같잖아!”)? 90년대 캐멀 코트의 유행은 80년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된다. 핫 핑크, 레드, 그린, 로열 블루가 칙칙한 회색, 파스텔 핑크, 올리브, 그레이 등으로 대체된 시기다. 풀 렝스 코트에 사용된 컬러라곤 블랙, 캐멀, 네이비, 그레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 시기를 가리켜 어느 영국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에서 밝은 색 코트는 대처 수상이 힘을 잃은 이후 사라졌다.’ 낙관적인 신자유주의 퇴조 때문에 패션계도 우울증에 걸린 건지, 그냥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건지, 여하튼 시기상으론 그렇다. 그 시기 외투의 유행 컬러들 중 가장 온화하고 화려한 색상이라야 캐멀 정도였다. 그러니 캐멀 코트가 여자들의 로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여자들의 로망이니 디자인도 여성스러워야 했다. 캐멀 컬러가 트렌드의 최전방에 등장한 40년대 후반도 마찬가지다. 당시 메인 컬러는 블루, 레드였지만 겨울엔 역시 모노 톤이 대세였다. 덕분에 낙타털 코트에서 유래한 캐멀은 즉시 여대생들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100% 캐시미어나 낙타털로 만든 캐멀 코트는 섬유의 보석이었다. 한 마디로 모노 톤 나라에선 캐멀이 여왕이라는 이론이다. 2000년대가 80년대처럼 컬러풀하진 않았지만 다양한 메인 컬러들이 왕좌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한 시대였으니, 암울한 색조들의 호위가 있어야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캐멀 코트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번 시즌 캐멀 코트의 귀환에 대해 패션 전문가들은(과연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는 ‘불황 이론’을 내세운다. 경제 불황 때문에 글래머러스한 아이템들이 물러나고 베이식한 것들이 다시 각광받고 있으며, 불황이라 오래 입을 수 있는 비싼 것 한 벌이 남는다는 근검 절약(?) 정신으로 소비자들이 무난한 컬러와 클래식한 디자인을 선호하고, 불황이라 패션 하우스들이 안전한 전통에 의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설득력 있는 얘기다. 그런데,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앨버 엘바즈의 화려한 F/W 컬렉션을 보고 ‘패션으로 침체된 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라고 한 게 누구더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의 인과론은 집어치우고 결과만 말하면,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캐멀 코트의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캐멀 코트는 우리에게로 와서 트렌드가 됐다. 그것도 다들 똘똘 뭉쳐서 엄청 큰 목소리로. 어쩌면 ‘90년대 캐멀 코트의 유행은 80년대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패션사가들의 진단이 발맹부터 2NE1의 무대의상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한 80년대 회고 트렌드를 꺾어보려는 야심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건지도 모른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나 남들이 뭐 입는지 전혀 관심 없는 패션 테러리스트였던 나로선 ‘커리어 우먼의 로망인 막스마라 캐멀 코트’에 대한 기억이 없다. 덕분에 아주 공정한 시선으로 이번 시즌 런웨이를 주름 잡은 낙타떼에 대해 품평할 수 있다. 낫 놓고 나이키도 모르는 일자무식 취급을 각오하고 말하면 이렇다. 문제의 ‘90년대 커리어 우먼의 로망인 막스마라 캐멀 코트’는 목욕 가운 같다. 내 옷장엔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블랙 울 코트가 한 벌 있는데 언니가 1996년쯤 동대문에서 샀다가 반려 고양이들의 만행으로 천연 털 코트가 되자 베란다에 처박아둔 것이다. 목욕 가운 스타일 코트가 90년대에 유행은 유행이었나 보다. 지난겨울 10여 년 만에 베란다 청소를 하다 그것을 발견한 나는 세탁기에 대충 돌리고 스카치테이프로 큰 털들만 떼어낸 다음 어두울 때만 입고 나갔다. 그런데 반응이 괜찮았다. 칼라도 실루엣도 심플해 어떤 과감한 유행이 세상을 휩쓸어도 끄떡없이 묻어갈 수 있는 디자인, 그게 바로 목욕 가운 스타일 코트다. 드리스 반 노튼도 목욕 가운 타입 캐멀 코트를 내놓았는데 솔직히 막스마라의 세로 포켓을 가로 포켓으로 바꿔놓은 것말고는 그 차이를 모르겠다. 지 드레곤의 ‘하트브레이커’와 플로-라이다의 ‘라이트 라운드’ 갖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여기에 코트와 같은 소재의 벨트 대신 가죽 벨트를 차고, 팔에 토시를 끼면 도나 카란 되신다. 두툼한 군용 담요에 라인을 둘러놓은 듯한 끌로에의 캐멀 코트는 시골 어르신들께 잘못 선물했다간 고스톱 매트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또 그 넉넉한 부피감 때문에 입는 즉시 꼬꼬마 텔레토비로 변신할 수 있으니 자신의 키가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10cm 이상 크지 않으면 포기하는 게 좋다. 앞섶을 꽁꽁 여미고 벨트를 두르면 키는 좀 커 보이겠으나 임산부로 오해받을 수 있다. 루이 비통 쇼에 등장한 박시한 캐멀 코트는 아무래도 패셔너블한 샴쌍둥이를 위한 마크 제이콥스의 선물이지 싶다. 값비싼 명품 옷을 한두 시즌 입고 옷장에 처박아둘 수 있는 대범한 사람이면 기분 전환 삼아 구입하는 것도 괜찮겠다. 전통적인 캐멀 코트를 트렌드와 과감하게 접목한 이번 시즌의 독특한 ‘신상’들은 좋은 눈요기지만 지름신의 전령은 되지 못했다. 모름지기 캐멀 코트라면 그 우아한 색상에 걸맞은 ‘고급스런 소재, 겸손한 듯 시선을 끄는 단정한 디자인이 생명’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낙타털 코트를 유행시킨 헝가리 귀족들처럼 허리를 졸라매는 코트 한 벌로 퍼스트레이디의 기품이란 무엇인지 증명한 재클린 케네디와 캐롤린 베셋 고부처럼, 당당히 상류층 스타일을 쟁탈하기 시작한 90년대 커리어 우먼들처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 쇼핑 리스트 맨꼭대기를 차지한 것은 역시 막스마라다. 원 버튼에 끈으로 여미는 전통적인 스타일은 딱 맞는 사이즈를 고르면 이너웨어가 부담스럽고, 한 사이즈 큰 걸 고르면 20cm짜리 하이힐을 신어야 할 듯해서 포기. 그래서 꿈의 캐멀 코트로 등극한 건 결국 버튼 네 개가 일자로 달리고 허리가 살짝 들어간 2009년 버전이다.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최고급 캐시미어, 가시 사이즈를 확 줄여주는 완벽한 재단, 튀지 않으면서도 화사해서 얼굴을 잘 살려주는 절묘한 컬러감이 매력적이다. 꿈의 캐멀 코트가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은 순간의 황송한 느낌이란! 로버트 패틴슨이 홀딱 벗고 와서 껴안아준대도 그보다 좋을 순 없으리라. 그래서 마침내 금궤를 하나 팔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일말의 망설임이 궤짝 뚜껑을 찍어 누른다. 캐멀 코트는 지금 ‘트렌디 클래식’이다. 서울 시내에 한 무리의 낙타떼가 출몰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다. 그 시기를 잘 버텨낸다 해도, 과도한 열기 후의 반사적인 냉담함으로 캐멀 코트가 다시 트렌드의 유배지로 귀양을 떠나면 어쩔 것인가? 클래식 추종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클래식이 유행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캐멀 코트, 그거 절대 사지 마라. 낙타떼가 출몰할 거라니까!”라고 해놓고 남 몰래 순금 시세를 검색해보는 1인, 여기 있다. ‘트렌디 클래식’에 이은 21세기 유행 법칙 제2조, ‘멀티 트렌드’의 위력에 기대를 걸면서.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