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voice] 삶을 대하는 태도는 슬렁슬렁에서부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저자이자 운동 예찬론자 황선우. 여성의 일과 몸에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 엘르 보이스,여자,우먼,여성,이야기

누구에게나 인생의 로망이 있다. 친구 하나는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매일 3등석 표를 사서 발레 공연을 보고 싶어 하고, 다른 친구는 몰타에서 1년 동안 살아보는 게 꿈이라 했다. 내 경우는 서울에서 3개월쯤 운동만 하고 싶었다. 투어와 투어 사이에 런던 하이드 파크를 조깅하다가 후줄근한 차림으로 파파라치 사진에 찍히는 마돈나처럼 운동 외에는 세상만사 다 하찮다는 듯이! 20년의 회사 생활을 마치고 프리랜서가 되면서 난생처음 스스로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자는 생각으로 한동안 여러 운동을 실컷 해보며 지냈다. PT, 혼자 하는 웨이트트레이닝, 필라테스, 요가 그리고 오래 별러왔던 수영까지. 물론 나는 마돈나가 아니니까 운동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회사에 다닐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시간 재벌이었다. 하루 두 시간을 운동에 쓰면서 멋있는 몸은 얻지 못했지만(식단 조절을 병행하지 않으면 운동만으로 다이어트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배움을 얻긴 했다) 소득은 있었다. 바로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세상에 나쁜 운동은 없다. 다만 신체의 어느 부위를 주로 사용하는가, 심폐 기능과 근력 중 어느 쪽이 요구되는가, 집중력을 얼마나 지속해야 하는가, 어떤 리듬으로 동작이 진행되는가 등등에 따라 더 재미있거나 덜 재미있게 느껴질 뿐이다. 개인의 체력이나 몸 상태에 따라 잘할 수 있거나 건강에 효과가 있는 종목도 각자 다를 것이다. 저마다 ‘나랑 잘 맞는다’는 운동의 발견은 이런 과정의 반복과 강화에서 온다. 내 경우 재미가 크거나 작거나 무엇을 배우더라도 선생님에게 듣는 말은 비슷했다. “회원님, 뭐가 그렇게 급해요? 체력은 좋은데 급해서 자세가 망가지는 게 문제예요.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동작을 정확하게 하는 데 집중하세요.” 여유롭게 운동에만 집중하는 날들 속에도 몸은 여전히 매달 ‘빨리 빨리!’를 외치며 일해온 20년 동안의 시간에 길들여져 있었다. 운동이 나에게 길러준 건 근력이나 지구력 외에 ‘결국 해내는 나’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요가 시간에 모든 동작을 다, 그것도 클래스 중에 유일하게 해내는 나! 코어가 튼튼해서 V자로 다리를 들어 올려도 금방 무너지지 않는 나에 대한 만족은 얼마나 큰 쾌감이었나. 그러나 수영을 시작하면서 ‘운동하는 나’의 자아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내 이상은 어깨를 휘젓는 접영이되 현실은 킥판을 붙잡고 동동대는 발차기였으니. 게다가 마음만 급해서 자세가 쉽게 망가지는 성격은 그 어떤 운동보다 수영을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개구리가 쪼그려 앉듯 엉덩이 뒤로 발뒤꿈치를 붙였다가 무릎을 뻗으며 발을 접어와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상체까지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자유형과 배영에서는 타고난 하체 추진력으로 빠른 속도를 얻었지만 자세가 거의 전부인 평영에 접어들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열등생이라니, 이건 내 로망에 없던 일이다. 어느 날 동거인의 어머니인 이옥선 여사께서 우리 집을 방문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도 썼다시피 운동하는 선배 세대가 거의 없는 나에게 멘토 같은 분이다. 병약한 젊은 날을 보낸 뒤 40대 이후에 운동을 시작해 70대인 지금은 “늙으면 자신감이 체력에서 나온다”를 외치며 아무렇지 않게 물구나무서기를 하신다. 저녁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소화를 위해 몸을 슬쩍슬쩍 움직이다가 갑자기 거실 바닥에 앉아 요가를 시작했다. 생활체육인끼리 단란한 화합의 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가벼운 무술 대련 분위기와 비슷했다. 스승과 제자가 나무로 된 칼을 부딪치며 검술을 연습하는 장면 같은(“이런 애송이 녀석! 넌 아직 멀었다!”). 배를 천장으로 향해 몸으로 아치를 만드는 차크라 아사나 동작을 가르쳐주면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선우 너 제법 소질이 있구나!” “어머니, 저 그래도 요가는 2년 넘게 했는걸요.” “아직 몸이 변할 때는 아니지. 무슨 운동이든 10년은 바라보고 해야 몸에 변화가 생기는 거야.” 부끄러워진 3개월 차 수영 올챙이 앞에서 20년 차 요가 수련자가 덧붙였다. “누굴 이기려는 마음 대신 슬렁슬렁해야 오래 할 수 있어.” 누굴 이기려는 마음. 내가 운동하는 동력이 그것이었을까? 그래서 마음대로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지는 기분이 들었을까? 아무도 나와 승부를 겨룬 적 없는데 멋대로 우월감에 도취되고 때론 또 열패감에 시달린다면, 그건 건강한 동력이 아니라 비뚤어진 호승심일 것이다. 시어도어 다이먼의 <배우는 법을 배우기>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동작을 익히거나 음계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부적절한 반응과 감정, 태도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다시 말해 자신의 여러 모습을 배우는 것이며….’ 내가 자유로워져야 하는 부적절한 태도가 무엇인지 분명했다. 나는 이기고 지는 걸 떠나는 법, 잘하지 못하는 채로도 계속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한번은 수영 선생님에게 사정이 생겼는지 대타 강사가 왔다. 본수업 대신에 자기 스타일로 진도를 나가면 곤란하니까 몇 가지 팁 위주로 알려주겠다면서 이런저런 기술을 시범 보인 다음 그가 말했다. “어차피 지금 제 얘기는 여러분이 수업을 마치고 샴푸하면서 같이 씻겨나가겠지만요.” 정말 신기하게도 지금은 수업 내용이 죄다 희미해지고 저 말만 기억 난다. 여전히 평영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접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다행히 물에 몸을 담그는 포근한 즐거움, 시선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놓여나는 자유로움에는 몰입할 수 있다. 듣고 배우지만 씻겨나가고, 느낌을 잡았다가 놓치고 다시 손에 넣는 시간들이 오래 쌓이면 뭔가가 될까. 일하면서 내 몸에 습관을 새겼던 20년의 시간은 확실히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운 좋게 수영을 계속할 수 있다면 70대쯤에는 멋진 접영 폼을 가진 할머니가 될지도 모른다. 아무도 이기려 하지 않고 슬렁슬렁.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이자 운동 예찬론자.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 '엘르 보이스'는 지금을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입니다.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