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물건] #02. 이 버버리가 니 버버리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까뜨린느 드뇌브와 사라 제시카 파커, 전지현의 공통점은? 바로 트렌치 코트를 입고 열연했다는 것이다. 초창기 디자인을 그대로 간직한 채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랑받은 아름다운 코트. 그 뒤에 숨겨진,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이야기들. | 요주의 물건,버버리,버버리 코트,토머스 버버리,트렌치 코트

  -  ━  #02. 이 버버리가 니 버버리냐     날씨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입추와 백로, 한로, 그리고 처서와 추분까지 지났으니 절기로는 이번 여름이 끝난 게 확실한데, 가을은 아직 올 듯 안 올 듯 미적거린다. 여름은 떠나려다 말고 뭉그적뭉그적. 애꿎은 태풍이 릴레이 주자처럼 줄지어 온다. 지구가 왜 이러나, 이러다 가을은 건너뛰고 겨울이 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옷장 속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트렌치 코트를 의식하는 것일 테지. 지금의 나처럼.     트렌치 코트는 태생적으로 날씨와 나란히 놓이는 물건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야전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 trench는 참호를 뜻한다) 속에서 영국군 장교가 입던 우비에서 유래한 이 옷은 혹독한 날씨를 견디기 위해 탄생했다. 요즘 우리가 입는 트렌치 코트의 형태는 토머스 버버리가 개버딘 소재를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무겁고 관리하기 힘들었던 기존의 울 방수 원단이나 고무 소재의 레인코트를 보완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스목프록(18세기~19세기에 영국의 농부나 마부, 양치기들이 궂은 날에 입던 코트)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방수 처리한 면사를 직조한 후 다시 한 번 방수 처리한 소재인 개버딘을 완성한다.     1918년, 버버리 광고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처음에는 단추가 없이 벨트로 여미는 단순한 우비 형태였던 트렌치코트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차 진화했다. 수류탄이나 칼, 탄약통 등을 부착할 수 있는 알파벳 D 모양의 고리, 장총의 개머리판에 옷이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오른쪽 가슴의 건 패치, 활동하기 편한 래글런 소매, 그리고 바람을 막기 위한 손목 벨트까지. 전쟁에서 필요해 만들어진 디테일들은 사라지지 않고 요즘의 트렌치코트에서도 발견된다.     군인들의 옷이었던 트렌치코트를 민간인들이 입게 된 건 2차 세계대전 이 후의 일이다. 전쟁이 모두 끝난 뒤 기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던 군인들의 머릿속에는 작은 바람 하나가 불쑥 솟아 맴돌았다. ‘이 옷을 계속 입고 싶다!’ 그것은 다시 찾아온 평화를 기뻐하는 물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페로몬을 풍기기에 마침맞은 물건, 게다가 실용적이기까지 한 물건이었다. 장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트렌치코트를 벗지 않았고, 그들의 옷은 곧 대중의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게티이미지<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 1961년 게티이미지 <외교문제(A Foreign Affair)>의 마들렌 디트리히. 1948년 게티이미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메릴 스트립. 1979년   트렌치코트가 대중화된 일에 가장 많이 기여한 건 당대의 무비스타들이다. 그들이 트렌치코트를 재발명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 아니 번역으로 유명한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거트,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 <나인 하프위크> 킴 베이싱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메릴 스트립 등이 영화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시대, 거의 모든 장르에 녹아드는 아이템이라는 것(탐정도 입고 악당도 입고 군인도 입고 바람둥이도 입고 비련의 여주인공도 입는다!). 영화배우뿐 아니라 영국 왕실을 비롯한 전 세계 각국의 정·재계 인사들에게도 두루 사랑받으며 트렌치코트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1983년, 노바스코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빈 이제 버버리 코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오양맛살, 스카치테이프, 대일 밴드처럼!) 그들은 여전히 트렌치코트를 만든다. 리카르도 티시의 감각을 더한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인다. 가죽이나 나일론 등 소재로 변화를 주거나, 빈티지 체크무늬, 호스페리 프린트 등을 활용하기도 하고, 오버사이즈 커프스나 사이드 슬릿 등 하나의 포인트를 더해 디자인을 차별화하기도 한다. 또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망이나 패브릭 조각, 산업용 플라스틱 등을 활용해 재생산된 소재(에코닐)로도 만든다. 그러나 그 곁에는 기존의 디자인을 고수하는 헤리티지 라인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단된 패턴의 조각 수, 단추의 개수, 버클과 금속 고리 디테일 등 대부분의 구조가 놀라울 만큼 초창기 모델과 똑같다.   이처럼 어떤 물건은 짐작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클래식한 디자인이 가진 힘 때문이다. 에드워드 7세가 외출할 때 “내 코트를 가져오라.”라고 말하지 않고 “내 버버리를 가져오라!”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코트. 영국인들이 대를 물려 입는다는 코트. 까뜨린느드뇌브가 입고 연기했던 그 코트를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도 입었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그 옷을 <베를린>의 전지현도 입었고, 알베르 카뮈가 즐겨 입던 그 코트를 위너의 송민호도 입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물건이 가진 힘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니 누군가 “트렌치코트라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그게 그거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더는 아무 말 안 하렵니다.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