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모델 안야 루빅이 바다에서 촬영한 자신의 누드 화보 몇 장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게시물에는 #plasticpollution #oceanpollution 등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해시 태그가 달려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가 걸치고 있는 건 바다를 잠식하는 플라스틱 병과 비닐뿐. 지난해 포토그래퍼 마리오 소렌티와 함께 몰디브 화보를 통해 바다 오염의 경각심을 고취시켰던 그녀가 해양환경보호 비영리단체인 팔리포더오션과 바다를 지키기 위해 다시 나선 것이다. 순간, 플라스틱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GPGP(Great Pacific Garbage Patch)’ 바다가 떠올랐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행동으로 인해 쓰레기의 역습을 받은 바다는 마치 쓰레기 더미에 갇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BBC는 4년 동안 제작한
을 통해 생태계 교란을 소개했다. ‘우리의 지구’라는 제목과 달리 ‘우리’ 때문에 훼손된 자연이 어떤 위협과 변화를 겪고 있는지 자각하게 만든 다큐멘터리다. 그중 약 10만 마리의 바다코끼리가 비좁게 살고 있는 러시아 북동부 해안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 내레이터는 바다코끼리가 서로에게 깔려 죽을 만큼 공간이 부족한데도 빙하의 변화로 사냥터가 줄어들어 이곳으로 몰려든다고 설명했다. 그중 일부는 암벽에 올랐다가 먹이를 찾으러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다. 암벽에 튕긴 채 추락하는 바다코끼리의 죽음은 말 그대로 비극적 재앙.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동물들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이건 지구를 오염시킨 우리를 향한 예고편이 아닐까?
‘리나일론’ 프로젝트의 과정이 담긴 프라다의 <왓 위 캐리>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보니 라이트가 에코닐로 만든 백팩을 메고 있다.
100% 재활용 원단을 사용한 파타고니아의 ‘리사이클 블랙홀’ 캠페인.
에코닐로 디자인한 버버리의 친환경 캡슐 컬렉션.
패션은 석유 다음으로 환경오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산업이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물 소비가 방대해 전 세계 폐수의 20%를 만들어내고, 이것도 모자라 매년 바다로 50만 톤의 초미세섬유를 흘려 보낸다. 매립지에 버려지는 옷은 매년 5000억 달러에 달할 정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0%가 패션 산업에서 생기고, 합성섬유는 천연섬유보다 더 치명적이며, 2015년 섬유용 폴리에스테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규모는 185개의 석탄발전소가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것과 맞먹는다. 적극적인 변화가 시급한 지금, 지구와의 공생을 위해 여러 브랜드가 사회적 책임의식 속에 자연친화적 방법을 모색하고, 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해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기후 변화 대응을 실시한 패션 산업 헌장이 대표적인 예. 버버리, 아디다스, H&M 등의 패션 브랜드가 오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감축하는 데 합의했으며, 최종 목표는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수 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올해 6월에는 프랑스 정부가 아마존과 럭셔리 브랜드들을 겨냥해 미판매 제품에 대한 소각과 파쇄 등 파기 행위 금지를 발표했다. 소각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 물질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버버리가 미판매 제품을 소각해 비난받았던 사건을 떠올리면 동시대 브랜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의식과 행동이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버버리는 환경의 가치를 생각하는 윤리적 소비를 위해 지속 가능한 패션 산업의 움직임에 뛰어들었다. 2025년까지 불필요한 포장을 축소 및 중단, 대체하겠다는 약속을 내세웠고, 재활용 쓰레기로 제작된 친환경 캡슐 컬렉션을 통해 환경친화적 방법을 모색했다. 낚시 그물이나 산업용 나일론 폐기물로 만든 버버리의 재생 나일론 에코닐(Econyl) 코트는 환경의 가치와 감각적인 디자인을 동시에 갖춰 패션의 혁신적인 대안을 보여준다. 버버리의 사회적 책임 담당 부사장 팜 베티는 “이번 컬렉션 출시는 2022년까지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 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언급했다.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약 10%를 패션 산업이 차지하는 만큼 패션 최전선에 있는 하이패션 브랜드의 행보는 긍정의 물결을 일으키며 파급력을 높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라다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퍼 프리’에 합류해 지속 가능한 패션을 시작한 프라다가 섬유 생산업체인 아쿠아필과 손잡고 ‘리나일론’ 프로젝트에 돌입한 것. 이번 협업을 통해 폐기물을 수거하고 2021년까지 나일론 전 제품을 ‘에코닐’로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나일론만 고집하지 않고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친환경 소재 개발은 미래를 향한 유산의 재탄생을 의미하며, 의식 있는 디자인이 의식 있는 소비로 연결되는 착한 패션 순환을 기대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함께 ‘리나일론’ 프로젝트 과정을 담은 프라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왓 위 캐리 What We Carry>를 통해 패션의 긍정 작용도 전달한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 중 지난 6월에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폐기된 카펫을 재활용하는 장면을 공개했고, 지난 7월에는 아프리카 카메룬의 오사 호수에 방치된 어망을 수거해 에코닐로 만드는 과정을 소개했다. 프라다는 재활용 소재의 출처를 담은 단편영화를 통해 지구에 버려진 쓰레기의 가치 있는 변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처럼 친환경 시대를 넘어 ‘필(必)환경’ 시대에 직면한 현재, 쓰레기 매립장이 될지도 모르는 지구의 위기를 막기 위한 브랜드의 움직임은 어둠 속의 밝은 불빛처럼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지난 4월 22일 지구의 날에 맞춰 셔츠당 12개의 재활용 플라스틱 병을 사용한 ‘어스 폴로’를 공개하고, 2025년까지 쓰레기 매립지와 바다에서 1억7000만 병을 제거하겠다는 폴로의 착한 패션 의식. 1993년부터 플라스틱 페트병 34개를 재활용해서 시그너처인 신칠라 스냅 티를 제작하고, 플라스틱 물병 1000만 개를 재활용한 ‘리사이클 블랙홀 컬렉션’으로 친환경 패션을 이어가고 있는 파타고니아의 집념. 2012년부터 현재까지 지속 가능한 소재를 앞세운 H&M의 ‘컨셔스 익스클루시브 컬렉션’이나 낡은 청바지를 재활용해 새로운 청바지를 선보이는 자라의 ‘조인 라이프 데님 컬렉션’ 등 1회성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상생하기 위한 패션은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바다 오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안야 루빅의 비치 화보.
아쿠아필과 협업해서 만든 프라다의 에코닐 나일론 백.
지구 온난화 문제를 막기 위해 등교 거부 1인 시위로 환경오염의 경각심을 고취시킨 스웨덴의 16세 그레타 툰베리가 얼마 전 태양광 소형 요트를 타고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항해를 떠났다. 2019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어린 환경 전사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다는 이유로 비행기 탑승을 거부했다. 뿐만아니라 지난 4월에는 유럽의회에 방문해 기후변화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기성 세대를 향해 쓴소리를 던진 이 소녀에게 반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자연을 물려줄 것인가. 자연을 집어삼키고 있는 오염의 가속화 속에서 머지않아 미세 먼지 경보와 쓰레기 더미의 공격이 일상을 잠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패션 산업의 친환경 자세가 만들어내는 변화와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업사이클 활성화를 통한 자원 낭비 절감과 유해 물질의 감소, 온실 가스 감축은 결국 장기적 관점에서 선택이 아닌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행보임이 분명하니까. 바로 지금, 긍정적 패션 순환이 필요한 때다. 더 이상 지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