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 김희정 대표의 사적인 취향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유행을 발빠르게 좇기보다 스스로 취향 있는 브랜드가 되려는 김희정의 소중한 그것들. | 김희정,브랜딩 디렉터,김희정 대표,퍼스,망원동

20년 가까이 브랜딩 일을 해온 김희정 대표에게 브랜딩은 세상을 얕고 빠르게 만나는 일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된 경험의 폭에 집중하며 스스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려는 그는 지난해 망원동에 ‘퍼스(Pers)’라는 공간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물과 음식, 분위기가 머무르는 퍼스의 취향에 공감하는 이들은 느슨한 연대감으로 자정까지 이곳을 찾는다. 공간은 망원동에 있지만 실은 10년 가까이 여의도에 살았고, 얼마 전 한남동으로 이사했다. 매사 많은 것에 열광하고 감탄하는 특기를 살려 반려견 릉이와 부지런히 남산과 이태원 근방을 탐색 중인 그는 능력 있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근사한 할머니 연대를 이뤄 옹기종기 모여 사는 꿈.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퍼스는 그 꿈의 시작과 같은 공간일지도 모른다. @darakband   「 1 종묘  」 신과 죽은 자를 위한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게 좋다. 작고 좁은 문과 압도적으로 대조적인 가로의 아름다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눈 내린 뒤의 종묘다. 긴 지붕 위에 수평을 이룬 새하얀 선이 깔리는 것을 봐야만 한다.   「 2 이솝의 베아트리체 오일 버너 블렌드 」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그곳의 냄새를 갖고 오고 싶다. 오래된 나무 향과 숲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이 에센스 오일은 교토의 이솝 매장을 감싸던 것. 교토라는 도시와 꼭 맞아떨어진 이 향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도 곧바로 살아날 것이다. 공간에 머물다 사라지는 음악처럼.   「 3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 」 영화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 이 영화를 꼭 본다고 한다. 내내 뽀로통하게 있다가 마침내 소원하던 선물을 받은 엔딩 속 소년의 얼굴처럼, 한 해의 끝과 시작에 이 영화를 보고 싶다. 목구멍 가득 차오르는 행복과 온기가 필요한 계절에.   「 4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 」 가까운 친구에게 선물받은 이 책은 매혹적인 촛불의 물질적 상상력과 기호적 사유를 시처럼 담고 있다. “촛불은 영혼의 고요함을 재는 예민한 압력계”라는 말처럼 촛불은 몽상가의 고독을 지킨다. 동문선 출판사에서 펴낸 버전을 갖고 있다.   「 5 배롱나무 」 다른 꽃들이 녹색이 될 때를 기다려 꽃망울을 터트리는 배롱나무는 여름의 아이돌 같다. 진도 운림산방이나 담양 명옥헌, 한여름에도 내륙으로 떠난다. 사실 꽃보다 운동선수의 몸같이 맨들맨들 단단하게 뻗은 줄기가 더 좋다.   「 6 아르네 보더의 빈티지 테이블 」 최근 이사하면서 로망이던 식탁을 구입했다. 4인용 원탁은 중간에 판을 끼워 늘리면 8명까지 앉을 수 있지만 혼자 일할 때 가장 좋다. 밥도 먹고, 글도 쓰고, 차도 마시고, 꽃도 올려 놓을 때 일상과 로망이 일치하는 기쁨을 누린다.   「 7 이토야의 연필 」 기념품을 갖고 싶었던 서른세 살, 33 자루의 회색 이토야 연필을 샀다. 한 번에 다 깎아서 책상 위에 올려둔 연필들과 함께 수많은 작업을 해왔다. 퍼스를 열며 다시 구입한 이 연필은 매월 첫날 깎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연필로 각자의 의미를 기록하길 바라면서.   「 8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수영장 시리즈 」 슬로바키아 출신의 사진작가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국내 첫 개인전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1930년대 지어진 오래된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인물들이 채광 아래 정물처럼 구도화된 모습은 사진이라기보다 그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