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는 2019년 9월호부터 매달 'Voices of Women' 칼럼을 통해 매달 여성이 바라본 세상을 오직 여성의 목소리로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 집에는 ‘옥장판’이라고 불리는 책이 있다. 과학적인 근거가 마땅치 않은 설명에 의하면 주로 노인을 대상으로 판매돼 언젠가부터 속아서 산 이상한 물건을 의미하게 된 옥장판. 우리 집 옥장판은 다름 아닌 내가 직접 만들었던 에코 라이프 매거진 <그린 마인드 Green Mind>다. 수년 전 절판을 선언하고 배본처에 있던 책을 강원도 화천 집으로 받았던 날, 2000여 권이 넘는 책이 현관 앞을 가득 막았던 날이 떠오른다. 다단계 옥장판처럼 책들은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책들을 보며 굳게 결심했다. 반드시 이 책을 잘 소진하고 말겠다는!
“다시 <그린 마인드> 안 하세요?” 고맙게도 오래된 이 잡지를 구하는 독자들의 연락을 종종 받는다. 덕분에 책을 보낼 때마다 책을 다시 펼쳐 읽고는 한다. 7년 전, 6년 전, 5년 전에 골똘히 고민했던 환경과 마인드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만나도 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입에 덜 붙었던 ‘지속 가능한 삶(Sustainable Life)’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꽤 친근해진 것처럼 말이다. ‘삶’이란 완벽한 단어 앞에 ‘지속 가능’이란 수식을 달았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배경인 자연과 인문 환경의 문제를 비로소 실감했다는 뜻이며, 문제를 자각함과 동시에 더 이상 ‘삶’을 고민과 성찰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와 반성이었다. 책을 만들기로 했던 당시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데도 ‘신념’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가장 걸맞았다. ‘삶을 대하는 마인드와 배경이 돼줄 초록을 담은 책을 만들어보자.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래서 콩기름 인쇄와 재생지를 고집했고, 제작부터 마케팅, 유통까지 친구와 둘이서 만들었다. 그것은 출판 형태를 한 일종의 사회운동이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재래시장에서 ‘껍데기를 거부하고 알맹이만 드리겠다’는 슬로건을 마주했다. 비닐봉지 한 장이 175만 개의 미세 플라스틱을 발생시킨다는 메시지와 함께.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재활용이 아닌 쓰레기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자세의 전파였다. 에코백과 텀블러까지 대여해 주는 이 시장의 프로젝트 중 가장 눈길이 갔던 건 바로 구매자가 통을 가져와 필요한 만큼 세제를 부어갈 수 있도록 한 부분이었다. 세제의 정체는 놀라웠다. 덕분에 무환자나무의 열매, 소프넛을 끓이거나 물에 담가 우려낸 물이 특별한 첨가물이나 가공 없이 완벽한 세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 역시 소프넛 열매를 직접 사용하게 됐는데, 그동안 써본 어떤 기성품보다 세정력이 우수해 충격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연이 준 것을 제대로 잘 쓴 기분, 세제 하나 바꿨을 뿐이지만 그것이 일상과 포개지는 순간 책을 만들었을 때보다 더 큰 성취감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프로젝트는 바로 매거진 <쓸 ssssl>에서 진행한 것이었다. ‘Small’ ‘Slow’ ‘Sustainable’ ‘Social Life’의 한 글자씩 따 ‘쓸 수 있는 자원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를 지닌 매체가 세상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든든한 동지를 얻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의 나는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주부 유튜버로 일상을 전하고 있다. 환경을 위한 실천 프로젝트를 매주 SNS에 올려 함께 실천하고 점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친환경 제품을 판매하며 환경 문제에 대한 견해를 올리는 작업자도 많다. 우리는 굳이 집단을 형성하지 않고도 개인이 여론을 만들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마이크로(Micro) 시위대’로서 연대한다. 그 많던 옥장판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단 한 권도 버리지 않고 4년에 걸쳐 정가보다 낮춘 금액으로 꾸준히 지속적으로 판매한 결과 지금 내 옷장에는 50권의 책만 남았다. 그리고 그 돈은 춘천의 미혼모 시설, 네팔 지진 구호 활동, 어려운 형편에 놓여 치료를 받지 못하는 어린이에게로 흘러들어갔다. 딸 나은이를 가졌을 땐 ‛#새책줄게헌옷다오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으니 어쨌든 책이 끝까지 책으로 운명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베란다에 가득 쌓아둔 책 박스가 햇살을 막았던 5년 전의 그날이 떠오른다. 어둑해진 베란다를 보며 남편과 동생은 자꾸 옥장판이라고 놀렸지만 오늘의 베란다는 햇살로 가득하다.
전지민 전 에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그린 마인드> 편집장. 딸과 강원도 화천에서 보내는 사계절을 담은 유튜브 채널 ‘나은 TV’를 운영 중. 시민이자 여성, 엄마로서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