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ELLE 보이스] 목숨에 무게가 있다면

범죄에 서열을 매기는 일은 잔인하다. 하지만 과연 보도는 공정한가?

BYELLE2019.09.05
 
이렇게 많은 사진을 보여줄 필요가 있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아내의 비밀과 거짓말-고유정은 왜 살인범이 되었나?’ 편을 보며 생각했다. 전 국민이 이름을 알게 된 고유정은 지난 5월 제주시의 한 펜션에서 전남편을 살해한 뒤 며칠에 걸쳐 시신을 훼손해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7월 27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전남편 살인사건 몇 달 전 고유정의 현 남편 아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정황을 파헤치며 고유정의 ‘셀카’, 10대 시절의 졸업 사진, 오래전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 일상 사진 등 수십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분명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 뒤에 숨겨진 악마성을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을 거다. 지난 6월 1일 고유정이 긴급체포되는 영상이 공개됐다. 해당 영상은 전 제주동부경찰서장이 제공한 것으로, 경찰청은 ‘체포 당시 영상을 개인적으로 제공한 행위는 경찰 수사사건 등 공보에 관한 규칙 위반’이라며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노컷뉴스> 유원정 기자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6년까지 5년 동안 검거한 살인 범죄자 중 남성 비율은 매년 8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사건에 대해 수사기관이 자발적으로 현장 체포 영상까지 공개한 사례는 없다시피 하다”고 지적했다. 범죄자의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잣대에 대한 문제 제기였지만 ‘더러운 페미니즘 기자’ ‘이보다 엽기적인 사건이 어딨냐’ 등의 비난 댓글이 기사에 쏟아졌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 김상중은 KBS <연예가중계>에 출연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자 고유정 사건을 꼽았다. 그가 진행을 맡은 2008년부터 방송 목록을 훑어보았다. 8세 아동을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 7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강호순 사건, 30대 남성이 16세 여성의 몸에 불을 지른 사건 등이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범죄에 대해 잔인함의 서열을 매기는 것이야말로 정말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왜 어떤 사건에는 ‘최악의’ ‘역대 가장 끔찍한’ 같은 수식어가 의심 없이 붙을까. 대중의 혐오와 호기심에 불을 붙인 건 물론 미디어들이다. <세계일보>의 ‘최초 공개 고유정 긴급체포’ 영상은 유튜브 조회 수 100만을 넘겼다. 고유정의 신상이 공개된 6월 5일부터 약 두 달간 한 포털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기사는 9000여 건, 그중에는 ‘고유정, 평소엔 귀염상?’ ‘한껏 치장한 고유정’ ‘고유정의 일상 속 환한 미소’  등 가십성 기사도 적지 않았다. 고유정 사건이 아무리 잔혹하다 한들 부인을 살해한 남편에 관한 미디어의 관심도 이 정도일까? 정치인 출신이기에 실명이 알려진 유승현 전 김포시의회 의장은 지난 5월 부인을 주먹과 골프채로 때려죽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 사건에 관한 기사는 500건이 조금 넘는다. 지난해 10월,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하고 도주한 김종선의 이름과 얼굴 사진을 온라인에 공개한 것은 그의 세 딸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오랜 기간 폭력과 학대를 견뎠던 그들은 수사기관에 범인의 신상 공개를 수차례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아 자신들이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명이 실린 기사는 수십 건에 불과하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경찰이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충분한 증거가 있고 공공 이익을 위하며 청소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다. 지난 5월, 순천의 30대 남성 정 모 씨는 회사 선배의 약혼녀가 사는 아파트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하다 피해자가 6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자, 화단에 추락한 피해자를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와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 3월에는 군산의 50대 남성 A 씨가 부인을 강간 후 살해하고 농로에 유기한 뒤 도주했다. 이들이 성범죄 전력으로 이미 전자 발찌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이들의 이름과 얼굴도 알지 못한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남편과 연인, 전남편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여성의 숫자를 발표한다. 가장 최근인 2017년의 숫자는 85명. 그나마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성이 여성 한 명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거나 온 국민에게 신상이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8월 2일에는 광주에서, 6일에는 용인에서 남성이 연인 사이였던 여성을 살해했다. 이 사건들은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1977년 SF 작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 지구 곳곳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남성들의 여성 살해 현상을 그린 작품 <체체파리의 비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방식이라고 부른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떨까. 한 여자가 남자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 남자가 여자를 죽이면 그 앞에는 ‘묻지 마’ ‘왜 안 만나줘’ ‘우발적으로’ ‘술김에’ 같은 표현들이 붙는다. 어쩜 우리는 ‘동일 목숨, 동일 무게’를 먼저 외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책 <괜찮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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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최지은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오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