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고담 시티를 지키는 영웅, 배트맨의 음침한 기운이 디자이너들의 영감 코드로 작용했다.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자리한 영웅을 향한 동경심이 발현된 듯 배트맨을 닮은 룩이 런웨이 곳곳에 포착된 것. 광택이 흐르는 케이프 자락을 펄럭이며 등장한 발망 레이디와 배트맨의 갑옷 수트처럼 견고한 보테가 베네타의 레더 룩,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구찌가 그 예. 웃음기 하나 없는 이들을 보고 조커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Why so serious?”

커튼이 걷히며 펼쳐진 이번 시즌 모스키노의 풍경은? 제레미 스콧이 연출한 TV 게임 쇼

겨울 왕국의 엘사는 눈꽃송이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긴 드레스를 입고 ‘Let it go’를 열창하며 전 세계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던 겨울 여왕이 동시대로 걸어 나온다면? 스위스 겨울 산장으로 탈바꿈한 그랑 팔레에 등장한 샤넬 레이디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을까? 롱 드레스 대신 엘사의 시그너처 컬러인 블루 톱에 화이트 와이드 팬츠를 매치하고 케이블카 백을 들고 나온 당당한 이 여인처럼!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 받은 호두까기 인형의 저주를 푼 마리의 모험담이 담긴 <호두까기 인형>. 호두까기 인형이 쓴 모자와 제복은 생쥐 떼를 물리친 용감무쌍한 정신처럼 견고하고 근엄하다. 흐트러짐 없는 동화 속 주인공을 닮은, 클래식한 제복의 변형을 런웨이에서 발견했다. 파코 라반은 부드러운 벨벳과 섬세한 자수 장식, 실버 단추 등 고풍스러운 제복의 요소를 차용해 절제된 화려함을 선사했고, 쿠레주는 화이트 셔츠와 누비 팬츠, 병정 모자로 도회적인 호두까기 인형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프라다는 이번 컬렉션을 통해 다크 로맨스의 스산한 매력을 전달했다. 블랙 레이스나 프랑켄슈타인 프린트의 드레스, 어둠 속에 핀 플라워 룩 등을 입은 냉랭한 표정의 모델을 앞세워 달콤한 로맨스를 탈피한 것. 그중 양 갈래로 머리를 길게 땋은 프라다 레이디는 <아담 패밀리>의 웬즈데이 애덤스가 성장한 모습처럼 기묘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흐른다. 1991년 이후 28년 만에 <아담 패밀리>가 애니메이션 영화로 돌아온 지금, 웬즈데이 애덤스의 시그너처 스타일을 향한 애정 공세는 지속될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