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이의 부암일기' #3 부암동 못 잃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부암동으로 이사 온 것은 필연이었다. | 부암일기,김소이,부암동,김소이 부암일기,소이

  2010년 가을, 나는 지난 한 이별을 겪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별 끄트머리 질펀한 미련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말이 옳겠다. 이미 5개월 전 끝난 연애를 놓지 못해 구남친의 영향권 속에서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밤늦은 그의 전화와 ‘자니..?’ 라고 적힌 문자에 여지없이 답을 했으며 어느 날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 무작정 그가 있는 곳으로 가 얼굴만 보고 오는 미련한 행동도 했다. 적지 않은 날들은 도저히 참지 못해 전화를 걸어 지질한 말들을 늘어놓기도 했고 그가 술에 취해 집 앞에 찾아올 때면 다시는 휘둘리지 않으리라 했던 다짐들은 무용지물이 되곤 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잔인한 말들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이별로부터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 헤어지고 싶은 거야?  라는 질문에 어떠한 미동도 없이 나의 눈을 바라보며 그가 대답했다.   너를 그만큼 좋아하는 것 같지가 않아.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언제나 미사여구 없이 짧고 명확한 말만 하는 그가 신기하고 근사했다.   얄궂게도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근사한 어휘력은 나에게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을 안겨주었고 더 나아가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내가 살던 동네, 삼각지를 참 좋아했다. 처음 본가에서 독립해 이사를 한 동네일 뿐 아니라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삼각지 청춘’이라는 주제곡을 만들 정도로 즐거운 추억을 쌓아 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어른이 된 것 같은 설렘,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한 서툰 고뇌와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으로 점철된, 나에게 청춘 그 자체의 동네였다.   하지만 그와 이별을 한 5월의 어느 밤을 기준으로 삼각지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삼각지 이외에도 상수동, 한강 이촌지구는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   구남친의 기억들로 많은 동네에 흉한 얼룩이 져버렸다.   그의 존재가 아주 희미해진 지금도 이상하리 만치 멀리하게 되는 장소들이다.     부암동에 막 이사를 오고 짐 정리를 하면서 옛 다이어리들을 펼치게 되었다.     오래전 일기들을 보며 낄낄 웃고, 부끄러움의 발차기도 하고 마음이 애잔 해져 먼 산을 바라보기를 반복하다가 2010년의 일기장 어느 한 페이지에 멈췄다.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나와 쓴 글인 듯했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다른 두 남자와 같은 공간에서 겪는 이야기를 보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부암동을 떠올렸나? ‘난 부암동은 한 사람하고만 갈 것’이라는 다짐이 적혀 있었다. 구남친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잔뜩 토해 놓은 일기의 마지막에는 ‘부암동에서 살아보고 싶다. 부암동 못 잃어’라고 써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2010년 10월 2일의 일기에서 2016년 부암동으로 이사 온 것은 필연이었다, 는 낭만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동네는 아껴 줘야겠다, 어쩌면 평생을 함께할 사람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될 수도 있겠다, 는 더욱더 낭만적인 다짐을 했다.     2019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조만간 [옥희의 영화]를 다시 한번 볼 예정이다. 영화를 본 후 오랜만에 삼각지에 놀러 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 동네를 용서해야겠다. 그곳에서 지극히 지질하고 치열했던 나의 모습을 용서해야겠다. 너무 오래 지나 우스워져 버린 이별처럼 우리의 재회는 농담 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의 청춘의 일부였던 삼각지를 마침내 되찾아올 것이다.       '김소이의 부암일기'는 매월 넷째 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김소이의 부암일기' #2 도심 속 작은 숲, 백사실 계곡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