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블유>의 장점과 단점은 모두 이 지점에서 나온다. 여성들은 모두 일을 각자의 방식과 신념대로 잘해내고 싶어 한다. 배타미가 밤새 TV를 틀어놓고 술을 마시는 이유는 ‘실연’을 당해서가 아니다. ‘실직’을 당해서다. 이 드라마는 30대 후반, IT 업계 대기업의 본부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여성이 무엇을 잃었을 때 가장 상실감이 클지 잘 알고 있다. 남녀 관계에서 오는 상처보다 믿었던 조직에서 내쳐지는 것이 훨씬 힘들 수 있다는 것. 같은 세대의 여성 시청자에게는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이런 전개는 이성 연애 중심의 드라마에서는 종종 무시돼 왔다. 드라마 속 여성들은 일 앞에서 가장 진지하고, 일을 통해 성장하며, 권력을 추구하여 위로 올라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배타미뿐만 아니다. 차현(이다희)은 회사가 지향하는 가치에 자신의 삶을 맞춘다. 유니콘의 이사 송가경(전혜진)은 과거 자신이 외부의 힘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지켰던 시절의 기억을 공격당할 때 가장 크게 상처를 입는다. 이 세 여성은 일 때문에 부딪히고, 경쟁하고, 힘을 합치고, 도우며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검블유>의 세계는 업계의 복잡함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공간이다. 일단 여성 임원이 무척 많다는 것부터 시작해 일하는 방식까지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적어도 <검블유>는 여성들을 출근하고, 일하고,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원하는 존재로 그린다. 성별 구분 없이 20~30대 여성 대부분이 일하는 시대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아무도 일하는 여성을 이런 방식으로 그릴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여직원과 실장님의 스토리였던 90년대 트렌디 드라마를 거쳐, 종종 특수 업계의 직종을 담아내는 드라마가 있었지만 직업은 설정으로만 존재할 뿐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는 전문직을 다루는 드라마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여성은 남성들의 세계 속에서 ‘홍일점’으로 신경 쓰이는 존재가 되거나, 그나마 몇 안 되는 여성끼리 서로를 시기하는 구도로 그려지기 일쑤였으며, 업무적인 경쟁은 또한 대개 이기는 자가 남성을 얻거나 남성이 택하는 존재가 이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니 <검블유>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드라마에서는 업무에서만큼은 남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권력 다툼도, 일과 관련한 신념을 지키는 것도 여성이며, 이들에게 배우며 성장하는 것도 여성이다. 이런 여성들이 애인, 남편과 얽히면 이해가 어려울 만큼 어리석거나 이성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라마가 지닌 치명적 약점이자 한계이지만 언뜻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이 서사에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봄 논란 속에서도 손익분기점을 넘는 흥행을 기록한 <걸캅스> 역시 일하는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서 <검블유>와 닮은 지점이 있다. 기존 수많은 남성 중심의 경찰영화, 형사영화의 클리셰를 여성이 수행할 때 느껴지는 재미가 이 영화의 핵심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박미영(라미란)과 조지혜(이성경)가 모두 성실한 직업인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서 시작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두 여성의 태도는 경찰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왜 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 더 가깝다. 성별을 떠나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범죄를 수사하는 것, 그게 바로 경찰의 일이라는 것이다.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윤리와 신념을 굽히지 않는 여성을 보는 경험은 힘이 된다. 국회를 중심으로 권력과 닿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정치 드라마 <보좌관>에서 국회의원 강선영을 연기하는 신민아를 볼 때처럼 말이다. 심지어 강선영은 배우 신민아의 성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주로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활약했던 배우가 자신의 실제 커리어를 한 번 더 확장해 냈음을, 화면을 보는 우리 또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맨스가 최고의 가치였던 할리우드식의 로맨틱 코미디 역시 여성의 일을 로맨스 서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가져오느라 분주하다.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는 여성과 그에 반해 소박하다고 분류될 법한 욕망을 가진 남성의 결합을 그리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그건 이미 ‘스타’ 여배우(줄리아 로버츠)와 서점 주인(휴 그랜트)이 만난 <노팅 힐>에서부터 다뤄진 것 아니냐고? 하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우리 사이 어쩌면>에서 앨리 웡이 연기한 사샤에게 중요한 것은 ‘스타’ 셰프보다 ‘셰프’라는 직업 그 자체다. 아시안 아메리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작품의 가장 큰 의미 너머에는 셰프로서의 삶이 ‘내 인생’이며, 생의 대부분을 사랑해 온 남자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 자리한다. 상대의 소중함을 깨닫고 돌아오고 반성하는 것은 모두 남자의 몫일 뿐. 사샤는 셰프로서, 사업가로서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개봉을 앞둔 영화 <롱 샷>은 한층 노골적이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아름다운 여성 정치인으로 대통령까지 꿈꾸고 있는 샬럿(샤를리즈 테론)은 어린 시절 동네 동생이었다가 이제 연설문 참모이자 연인이 된 프레드(세스 로건)에게 대통령이 될 자신을 위해 그림자로 남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샬럿은 대중에게 진실을 말한다. 프레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신념과 양심 때문이다. 여성의 직업이 사랑 앞에서 종종 가치절하당하기 일쑤였던 장르에서도 변화가 시작된 셈이다.
물론 몇몇 작품을 거론하며 일하는 여성을 그리는 미디어의 방식이 진화하고 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 콘텐츠에서 이런 움직임은 극히 일부이고, 이전과 다르다고 평가할 만한 캐릭터들 또한 이성 로맨스를 통해 구원받거나 치유되는 양상을 보이기 일쑤다. 무엇보다 최근 여성의 직업과 관련해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내느라 분주한 여성들의 활약을 생각하면 드라마나 영화의 이런 움직임은 현실에 비해 너무 뒤처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스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취업과 경력을 쌓는 과정, 임금에서 차별을 겪다가 결혼이라도 하면 경력 단절의 위험을 감수하고 슈퍼우먼이 되기를 요구받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일과 일을 대하는 태도, 일을 둘러싼 환경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나 많은 콘텐츠 창작자들은 여전히 이 지점을 놓치고 있다. 여자들 또한 일하고, 일을 통해 생활을 꾸리고 일상을 유지할 뿐 아니라, 업무적 성취를 원하고 그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 로맨스는 일상을 거들 뿐, 그 또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젠가 우리는 조금 더 업데이트된 배타미를 만날 수 있을까? 이제 그 다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다.
윤이나 칼럼니스트, 다양한 콘텐츠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헤이메이트’ 콘텐츠 기획자. 책 <미쓰윤의 알바일지> <여자들은 먼저 미래로 간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