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패션 디자이너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디자이너들을 매료시킨 제3세계의 치명적인 매력에 관하여. | 트렌드,패션위크,제3세계,아프리카,이집트

  “밥을 먹고 있는데 원숭이 한 마리가 식탁 위로 오르더니 바나나를 잽싸게 채가는 거야.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 진짜 좋았어. 기회가 된다면 꼭 가 봐.” 얼마 전 남아프리카로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지난 여름휴가의 기억을 떠올리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잦은 장거리 출장으로 동남아시아 정도가 최선의 휴가 선택지인 내게 환승의 환승을 거쳐, 비행 시간이 20시간 꼬박 넘게 걸리는 아프리카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여전히 갈 엄두가 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 세계가 궁금해졌다. 창문 너머로 물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더위에 지친 코끼리가 물속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희귀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상상해 보라. 이뿐 아니다. 강 위를 유유히 떠다니며 잠베지 강의 일출을 감상하는 호사라니, 마치 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 아닌가. 살면서 한 번쯤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최근 남아프리카를 비롯해 이집트, 마라케시 등 좀처럼 ‘여행지’로 쉽게 떠오리지 않았던 스폿들이 관광 산업의 랜드마크로 부상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에 갈증을 느끼는 디자이너들은 이미 남보다 한 발 앞서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났다. 대표적인 예로 버버리의 리카르도 티시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집트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공유했다. 게시물마다 ‘#onlybeige’라는 공통된 해시태그를 남긴 그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하우스의 DNA 컬러인 베이지색 모래로 뒤덮인 매력적인 도시에서 휴식은 물론 다음 컬렉션에 대한 영감까지 얻은 듯했다. 이집트의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떠난 디올 맨의 아티스틱 디렉터 킴 존스는 광대하게 펼쳐진 오아시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포스팅하며, 설렌 감정을 드러냈다. 그가 휴양지로 선택한 시와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도 무려 차로 11시간이나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고! 지리적·문화적으로 독특한 위치에 자리 잡은 이 도시들은 단순히 휴양지를 넘어 때로는 디자이너들의 영감 대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공방 컬렉션으로 남은 ‘2019 파리–뉴욕 공방 컬렉션’은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영감을 얻어 다양한 골드 컬러 팔레트와 유색 보석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이집트 문화 특유의 화려함을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쇼가 진행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이집트관에 자리 잡은 덴두르 신전은 실제로 이집트에 와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평소 아프리카 문화에 조예가 깊은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지난 4월에 진행된 2020 크루즈 컬렉션 장소로 마라케시를 선택했다. 크리스찬 디올의 첫 번째 후계자이자 모로코의 매력에 심취해 있던 이브 생 로랑의 발자취를 따라간 그녀는 원단 제조 업체인 유니 왁스를 지지하며 이들과 손잡고 마라케시 특유의 색채가 담긴 패브릭을 탄생시켰다. 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인 파테 우에드라오고(Pathe′ Oue′draogo)와 협업해 밝은 컬러와 대담한 프린트가 인상적인 티셔츠를 제작하기도. 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풍경과 맹수, 타로 모티프의 패턴을 곳곳에 녹여내 아프리카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모로코와 란사로테 섬의 장대한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진 발렌시아가의 광고 캠페인 역시 눈길을 끈다. 감독 장 피에르 아탈은 자신의 사회학 탐구 시리즈인 <페 이자주 에트노그라피크 Paysages Ethnographiques>에서 착안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걸음걸이와 스타일로 사막을 횡단하는 독특한 장면을 프레임에 담아냈다. 현대 건축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황량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막을 탐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이외에도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인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뿌리인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문화에 매료돼 종종 디자인에 반영하곤 했다. 애니멀 패턴의 아플리케와 사파리 복장을 연상케 하는 사하리엔 컬렉션이 대표적인 예. 이후 변화를 거듭하며 완성된 벨벳 소재의 니커보커(무릎까지 오는 품이 넉넉한 실루엣의 팬츠)와 사파리 재킷은 오늘날 하우스를 대표하는 시그너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패션계는 왜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낯선 도시에 관심을 쏟고 있는 걸까?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출시되는 요즘, 영민한 소비자들은 쉽게 지갑을 열지 않는다. 이들은 취향과 개성을 중시하며, 자신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갖길 원한다. 그런 그들에게 획일화된 기성복에서는 볼 수 없는 대담하고 독창적인 프린트를 더한 장신구나 독특한 왁스 프린트의 패브릭은 신선한 요소로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이탈리아 장인과 견줘도 결코 뒤지지 않는 원주민의 수공예 기술까지 더해진다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직까지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아프리카나 이집트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는 여전히 직접 옷을 지어 입고,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전통 방식으로 그들만의 고유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늘 독창적인 것을 갈구하는 디자이너들 역시 이들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환경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밖에 없을 터. 무한한 성장 잠재력 또한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연평균 4% 정도의 성장 수치를 보이고 있는 아프리카 전체인구는 약 12만 명이며, 그중 2억 명 가까운 이들의 평균 나이가 15~25세라고. 세계에서도 젊은 인구의 분포도가 높기로 손꼽히며, 이는 곧 향후 산업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젊은 인구가 많아지면 패션 산업 성장 또한 촉진될 것이라는 전망.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의 증가 현상 역시 아프리카를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꼽는 이유 중 하나다. 이처럼 제3세계에 대한 패션계의 관심은 일시적 현상일까? 모로코의 소설가 타하르 벤 젤룬의 책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슬람 이야기>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문화는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죠. 우리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서로 다른 전통과 삶의 방식을 지닌 사람들 역시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그의 말처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외모는 물론 취향과 문화까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다양성’이 세계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이라면, 변방에 있는 제3세계가 패션 산업을 구축하는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건 시간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