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우리가 줄리엣 비노쉬의 모험을 뒤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일부러 애매한 말(?)을 늘어놓는다. <쉬린>에 이어 다시 호흡을 맞춘 그는 비노쉬와 함께 한 특별한 작업에 대해 털어놓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그녀와 함께 방문한다. |

키아로스타미의 신작 에서 자신의 책 홍보차 투스카니를 방문한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는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는 ‘그녀(줄리엣 비노쉬)’를 만나 투스카니 관광에 나선다. 식당에서 부부로 오인 받은 두 사람은 이후 부부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들의 대화는 지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감성적인 것으로 점점 변해간다. ‘진품과 위작’의 주제는 회화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로 나아간다. 당신만이 유일하게 우리 관객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전말을 아는 사람인가요?아닙니다. 나도 몰라요. 나한테 좋은 관객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어떤 해석도 편애하지 말아야겠지요. 게다가 나는 사람들한테 어느 한 관점에만 치중하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는 혹시 비밀을 담고 있으며, 관객들은 대단히 집중하면 이 비밀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건가요?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 영화를 조금 더 수수께끼답게 만들고, 서사를 파괴하기 위해서, 쏟아지는 질문이 그에 대한 대답보다 더 많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해결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도록 하자는 선택을 한 셈입니다. 지극히 고전적인 이야기를 지극히 현대적인 어법으로 표현했다고나 할까요. 남녀 한 쌍의 이야기만큼 진부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된 고전 중의 고전이니까요. 그 두 사람은 자기들뿐이었죠. 다른 사람들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당신은 줄리엣 비노쉬에게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하면서 시나리오를 들려주었다더군요. 정말 자전적인 이야기입니까?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런 형태로는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시인 페르도시에게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영웅 로스탐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로스탐이라는 인물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 로스탐은 내가 만들어냈죠!” 나도 시놉시스의 자전적인 면에 관해서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군요.어떻게 해서 여주인공으로 줄리엣 비노쉬를 낙점하게 되었나요?나는 이 시나리오를 줄리엣을 생각하면서, 또, 줄리엣의 요청에 따라서 썼습니다. 줄리엣은 내가 별 생각 없이 이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아주 열정적인 반응과 흥미를 보였지요.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줄리엣이었고요. 그래서 나는 줄리엣을, 그녀의 생김새와 성격, 그녀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현재 관통하고 있는 지점 등을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전적으로 줄리엣에게서 영감을 얻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죠.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인물은 자신이 사람들한테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한다고 노상 불평을 합니다. 혹시 여배우에 대한 우화일 수도 있을까요? 내가 아는 여자들은 전부 그런 불평을 하더군요. 여자들이란 전부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상대방이 피치 못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아야만 할 때는 그 같은 욕구가 더욱 심해집니다. 가령 당신이 운전대를 잡고 구부러진 길을 돌아야 할 때 “길 좀 그만 보고 나를 보란 말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영화는 이런 식의 세부적인 상황들을 이어붙여서 만들었죠.언제 처음 줄리엣 비노쉬를 만났습니까?14년 전 어느 파티에서였습니다. 나는 줄리엣이 나온 영화라고는 한 편도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아주 유명한 배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죠. 우리 두 사람은 말하자면 함께 작업하면서 우정을 쌓아올린 사이가 아니었다는 얘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 두 사람이 공통으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 집에서 다시 만났습니다.배우로서 어떤 면이 마음에 들었나요?그야 당연히 뛰어난 감수성이죠. 그리고 일단 일이 시작되면 철저하게 자아를 버리는 능력. 줄리엣은 내 카메라 앞에 섰던 배우들 가운데 가장 단순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와 작업하는 동안 정말이지 나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스타가 되면 직업적으로도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줄리엣에게는 그런 면이 전혀 없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당신은 여자에게 더 가깝게 느끼셨나요, 아니면 남자 쪽에 더 수긍이 간다고 느끼셨나요?나는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가깝게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아직도 그 작품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죠.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몇 달을 기다려야 그 거리가 생기죠.듣자하니 는 당신이 쓴 최초의 시나리오이며, 일반적으로 당신은 시나리오 없이 영화를 찍는다더군요. 정말입니까?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1977년에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찍을 땐, 메모를 해두었죠. 상당히 많은 분량의 메모였는데, 촬영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그걸 조금씩 수정해나가는 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이번에 를 찍을 땐 제작사인 MK2 측에 그 사람들이 안심할 만한 증거물을 보여주어야 했지요. 사실 처음엔 언제나처럼 찍으면서 중간 중간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전문적인 배우들이 매우 당황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도 조금씩 수정을 시도해 보았는데, 역시나 배우들에게 수정안을 받아들이게 하기란 매우 까다로운 일이더군요.그러니까, 그 말은 전문적인 배우들이 아마추어 배우들보다 감독하기 어렵다는 말씀인가요?중간 궤도 수정이라는 관점에서는 어쩌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나머지에 관해서라면, 전문 배우들은 두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심플하지요. 이제까지 영화 감독하면서 처럼 찍기 쉬웠던 영화는 없습니다.그건 왜죠?왜냐하면 제작자가 있었으니까요. 나는 연출에만 집중하면 되었거든요.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 한두 가지 일을 맡고 있었죠. 일당 50이나 100을 뛰어야 하는 일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결 평온했습니다.이 보편적인 이야기는 토스카니 지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도 얼마든지 촬영 가능했을까요?나는 이 영화를 그 지방을, 문화와 풍경이 일체를 이루는 그 지방을 위해 썼습니다.여주인공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합니다. “만일 내가 여기 오게 될 줄 알았더라면, 구두를 신지 않는 건데 그랬어.” 그 마을로 남자를 끌고 온 건 분명 여자였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그 말을 이런 식으로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일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될 줄 알았더라면, 이런 데다 발가락을 구겨 넣지는 않았을 거야.” 혹시 살면서 어떤 만남이 시작되는 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데 주목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먼저 나한테 전화했잖아.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당신이야.”그럼 헤어질 땐 어떤가요?그것도 마찬가지죠. 자기가 상대방을 떠나는지, 상대방이 자기를 떠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당신 영화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더군요.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안다면, 고전적으로 교훈을 끌어내려 하겠지요. 그런데 언제나 흥미 있는 건 동기가 아니라 문제 제기입니다. 나는 가 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걸 나중에 알아차렸습니다. 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자살의 비밀을 파고들기를 일찌감치 포기하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절대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수수께끼는 100퍼센트 해명되지 않는데,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필요가 없고, 그저 절반 정도만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줄리엣 비노쉬는 시나리오를 받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자신이 연기해야 할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지 못하고, 그 여자가 이 남자와 함께한 과거가 있었는지 모른다는 설정에 동의하던가요?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질문이 굉장히 많더군요. 날 붙잡고 걸핏하면 그 여자가 혹시 미친 건 아니냐고도 여러 차례 물었죠. 그래서 나는 “아니다. 그 여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여자를 연기하기 위해서, 줄리엣은 그 여자를 완벽하게, 속속들이, 사전에 미리 알고 싶어한 반면, 나는 찍어가면서 보자고 제안했고요. 우리는 말하자면 일종의 협약을 맺었습니다. “한 장면 한 장면씩 찍어나가되, 무언가 당신의 논리에 저촉이 된다면, 무언가가 저항감을 일으킨다면, 나는 촬영을 멈출 것이고, 당신은 의문 나는 걸 남김 없이 죄다 묻는다”고요. 하지만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니 줄리엣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등장인물과 그 인물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그만큼 자연스러웠다는 말이 되겠죠.그런데 지금 와서 줄리엣 비노쉬는 사랑 이야기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닌지, 또 여자가 남자를 자신의 광기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는지 아닌지, 그런 건 전혀 알 바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줄리엣은 그런 질문엔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아요.그것 참 마음에 드는군요!이 영화에서는 카메라 또는 관객이 정면에 놓인 거울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관객들과 상대합니다. 말하자면 관객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큼 그들도 관객들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그러니 이 이상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슨 역할을 맡은 건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오래 자문할 필요 없어요. 관객들이 당연히 주인공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