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츠는 한동안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스커트는 길이 하나만으로 트렌드를 좌지우지하고 경제지표까지 제시하는 바로미터 경지에 올랐지만 팬츠는 몇년 전부터 한 가지 아이템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질 못했다. 감히 무릎에서 1cm 정도의 펄럭이는 여유분조차 죄스럽게 만들고 여성도 모자라 남성의 다이어트를 전 국민화시킨 문제적 스키니 팬츠 때문이다. 나름 팬츠들은 케이트 모스나 케이티 홈즈와 같은 패션 아이콘들에게 벨 보텀 같은 아이템으로 조심스럽게 다양성이라는 돌파구를 시도했다. 방향을 잃어버린 듯하지만 여전히 이상적인 팬츠를 향한 갈망으로 꿈틀거렸던 거다. 하지만 팬츠에겐 갖춰야 할 자격조건이 까다로웠다. 모름지기 힐과 테일러드 재킷으로 성장하거나, 주말에 입는 티셔츠에 컨버스화를 신더라도 편안하게 두루 어울려야 하고 그러면서도 반드시 스타일리시해야 한다. 이리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있을까.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인내심에 대한 보답을 받을 때인 듯하다. 2010년 F/W 시즌은 그야말로 팬츠의 해니까. 아름다운 테일러링 팬츠 없이는 그 어디에도 나서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번에야말로 옷장 속 주요 아이템으로 팬츠에 투자해야 할 때다. 구찌, 푸치, 발맹은 데이웨어와 이브닝웨어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우아하고 매끄러운 팬츠를 선보였고, 3.1 필립 림과 로샤스에선 한층 정제된 플레어 컷의 팬츠, 미우미우에선 슬림한 나팔바지 형태의 블랙 팬츠 그리고 구찌에선 로웨이스트 부츠 컷을 등장시켰다. 이 뉴 팬츠들은 소란스러운 감탄을 자아내진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미학적 기호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피비 파일로는 신중한 핏과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라인으로 여성미와 중성미의 완벽한 퓨전을 보여줬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웨어러블함까지 갖췄다. 끌로에도 모던한 커리어 우먼을 위한 버전을 선보였다. 세피아 톤의 소프트한 와이드 레그 팬츠에서부터부터 하이웨이스트 블루진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 <미녀삼총사>에서나 볼 법한 복고적인 성향의 디자인을 트위스트했다. 끌로에 팀에 따르면 올 시즌 맥기븐이 주도하는 팬츠의 부활은 ‘비현실적인 비율을 지닌 롱다리 패션 모델이 아닌, 리얼 우먼을 위한 컬렉션’이라는 것. “여성들은 벅찬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요. 그건 리얼리즘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편안하고 자유롭고 쉽게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하죠. 팬츠들의 지나친 섹시함과 과시성을 절제했어요. 약간 남성스러운 영향력이 포함돼 있지만 그래도 굉장히 여성스럽죠.” 두 영향력 있는 레이블(특히 여성이 선호하는)에서 보여지는 팬츠의 귀환은 패셔너블하면서도 쉽게 입을 수 있는 룩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덕분에 칵테일 드레스를 대신할 팬츠 수트라는 다소 생소한 트렌드를 몰고 왔다. 90년대를 풍미했던 팬츠 수트, 역시 패션이란 돌고 도는 것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보테가 베네타, 지방시, 아크리스처럼 우아함을 중시하는 브랜드에서는 어떤 룩보다 재킷과 한 세트로 이뤄진 팬츠 수트를 제시했다. 30년대에 코코 샤넬과 마를렌 디트리히가 입고 나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처럼 여성들의 패션 라이프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여성들은 회사 일을 끝내고 드레스로 갈아입느라 허둥대는 일은 면할 수도 있을 것. 그 덕에 진이나 티셔츠에 매치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테일러드 재킷 또한 팬츠와 매치되면서 테일러드라는 이름값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됐다. 현실 속의 리얼 우먼을 위한 팬츠들! 이젠 지겨운 스키니 팬츠나 레깅스와의 결별을 선언한 뒤 팬츠와 매치하면 좋을 하이힐과 스몰 사이즈의 백, 보일 듯 말 듯한 펜던트를 챙길 것. 한층 성숙해진 뉴 팬츠들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4 key style 당신이 주목해야 할 4가지 뉴 팬츠들
flared pants design 폭이 넓은 밑단과 하이웨이스트 디자인이 특징인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복고적인 스타일의 팬츠. 내 다리가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비현실적인 바람을 현실에서 실현하게 해줄 꿈의 아이템.
Matching Point ● 바지 자체가 신체 비율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중량도 꽤 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반드시 벨트를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를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 피트되는 블레이저나 블라우스와의 매치를 통해 사무실에서도 적합한 룩으로 소화할 수 있다. 레더 재킷을 입는다면 시크한 로커 룩으로도 변신 가능. ● 폭 넓은 밑단을 든든하게 지지해줄 안정적인 슈즈를 챙겨야 한다. 흔들리는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철갑을 두른 듯 든든한 통굽 신발이나 부티가 추천 아이템. ● 매치하는 아이템 컬러를 비슷하게 시도해볼 것. 가령 끌로에처럼 캐멀 니트에 캐멀 팬츠를 입는다면 마치 캐러멜 폭포가 흘러내리듯 매끄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낼 수 있다. 만약 당신의 다리 길이가 좀 더 받쳐준다면 마를렌 디트리히와 로렌 휴튼의 중간에 선 느낌도 연출 가능하다.
cigarette pants design 스키니 팬츠와 닮은 것 같지만 일관된 좁은 폭으로 스트레이트 실루엣으로 떨어진다. 억지로 몸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었을 때 발목 부분은 조여지고 허벅지 굴곡은 자연스럽게 잡혀지기 때문에 훨씬 심플하고 시크하다.
Matching Point ● 블랙 컬러는 가장 클래식한 옵션이다. 빳빳한 화이트 셔츠나 스마트한 피코트와 매치해 단정함을 살린 데이웨어로 활용하면 좋다. ● 구찌 컬렉션에서처럼 로웨이스트의 팬츠를 선택한 뒤 깊게 파인 V네크 블라우스를 입으면 노출 있는 드레스보다 훨씬 섹시한 연출이 가능하다. ● 팬츠 가운데에 일직선으로 나 있는 라인이 생명이다. 라인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슈즈 또한 앞부분이 뾰족한 것이라야 발끝까지 아스라히 연장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뾰족한 토힐의 스틸레토도 추천 아이템. ● 테일러드 재킷과 함께 팬츠 수트로 연출하면 파워풀하면서도 패셔너블한 우먼으로 대접받을 것. 팬츠 수트야말로 이번 시즌 가장 ‘핫’한 룩이다.
cropped pants design 발렌시아가와 알렉산더 왕, DVF 컬렉션에서 제시한 뉴 팬츠. 무릎과 발목에 중간에 길이가 새로워 당황스러울지 몰라도 시도해본다면 웬만한 여성에게 다 잘 어울리고 슬림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atching Point ● 심플한 톱과 하이힐만으로도 자유로우면서도 약간 섹시한 룩을 연출할 수 있다. 너무 딱딱하거나 엄격한 느낌을 주지 않은 채 충분히 미니멀리즘을 표현할 수 있는 팬츠이기 때문. ● 스타킹은 아예 신지 않거나 마르니처럼 바지 밑단과 스타킹의 경계가 맞닿도록 해서 걸을 때마다 맨살이 살짝 드러나도 재미있다. 프라다처럼 두꺼운 게이지의 양말을 신을 때는 팬츠의 컬러와 비슷한 톤에서 고르도록. ● 무조건 힐은 높아야 한다. 플랫폼 스타일의 로퍼나 발목이 꽉 조여 앞에서 봤을 때 곧게 보이는 부티도 좋다. 앞코가 둥근 펌프스라면 복고적인 느낌도 낼 수 있다. ● 재킷을 시도할 때는 아예 길거나 짧은 것을 고르도록. 박시한 라인으로 허벅지까지 오는 재킷이라면 층층으로 된 길이만으로도 팬츠와 재미있는 밸런스가 연출된다. 짧은 재킷이라면 벨트로 조여 더욱 짧게 만든 뒤, 힙 라인부터 시선이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jodhpur pants design 남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승마 전용 팬츠가 아니라 밀리터리 트렌드가 접목한 세련된 스타일이다. 발목은 여전히 좁지만 힙 부분의 볼륨은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테일러드 감각을 부여해 드레시한 느낌과 실용성을 살렸다.
Matching Point ● 드리스 반 노튼에서 제시한 스타일링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카키 컬러로 다분히 사관생도처럼 보일 법도 한데, 좋은 소재의 팬츠를 골라 테일러드 재킷, 퍼 머플러, 악어가죽 가방과 같은 고급스런 아이템과의 매치로 포멀한 룩으로의 반전을 이뤄냈다. ● 조드퍼 팬츠만의 곡선을 살릴 것. 어설프게 엉덩이를 덮는 상의를 선택했다가는 뚱뚱한 하체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허리까지만 오는 짧은 재킷이거나 블라우스는 아예 바지 안으로 넣어 입는 것이 현명하다. ● 사이하이 부츠를 선택해 라이딩 룩의 묘미를 제대로 맛보거나 아무런 장식 없는 심플한 펌프스로 팬츠만 돋보이게 한다. ● 남자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게이지의 니트나 한쪽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 큰 부피감의 니트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루엣 전체에 넘실거리는 볼륨감으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