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모도바르의 새로운 경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멜로의 거장이 돌아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번에도 그를 기다렸던 영화광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또 한편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신작 <브로큰 임브레이스> 역시 알모도바르의 장기인 멜로드라마의 향연이다. 이번 작품은 멜로드라마의 집대성이라고 불릴 만한 야심을 노출하고 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 페넬로페 크루즈, 영화, 무비, 엘르, 프리미어, elle.co.kr:: | :: 브로큰 임브레이스,페넬로페 크루즈,영화,무비,엘르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페넬로페 크루즈, 블랑카 포르틸로, 루이스 호마르, 루벤 오칸디아노 러닝타임 127분 개봉 11월 19일 말년의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여러 번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또 그렸지만 단순 반복이 아니었다. 이 연작들은 언뜻 보고 있으면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심오한 숨결을 감추고 있다. 생 빅투아르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표현하는 방식의 진화는 곧 20세기 미술을 예견하기에 이른다. 멜로드라마를 테마로 미묘한 변주와 차이를 반복하는 알모도바르의 1990년대 이후 작업들 역시 빛의 화가 세잔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결정판이자 멜로드라마의 집대성이다. 또한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에게 있어서 왕가위의 , 데이비드 린치의 가 그들 각자의 필모그래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유사한 지점에 있다. 왕가위와 린치가 그랬던 것처럼 알모도바르도 에서 영화 이미지의 역사를 성찰하거나 자기 작품을 패러디(재구성)하는 자기 반영적인 구조 안에서, 지금까지의 영화 작업을 통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중에 영화 감독이나 작가가 등장하는 형식을 통해 메타적인 영화를 찍어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욱이 를 통해 지금까지 전경화하지 않았던 그의 영화적인 야심을 비로소 표출한다. 자신의 영화들을 경유해 세계영화사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일종의 멜로드라마의 계보학을 다시 쓰려는 시도다.그는 최근 영화들에서 , 의 직접적인 영화 이미지를 인용(인서트)하거나 류의 영화들을 직접 언급한다. 게다가 고전 영화들의 내러티브를 패러디하거나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단순히 시네필적이고 키치적인 B급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멜로드라마의 아카이브(혹은 박물관)를 직조하기 위한 야심을 표출한다. 이것은 거대한 지식의 창고를 상징했던 보르헤스의 서재와도 같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알모도바르는 영화의 외연을 펼치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구성했다.알모도바르판 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한 편의 영화가 그 자신을 스스로 재구성해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물론 에서 이미 그와 유사한 시도를 한 적이 있지만 내러티브 전체의 재구성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는 한층 더 진화된 형태를 선보인다.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영화들이 소환되고, 그 영화적 기억과 관객 각자의 내러티브 구성의 욕구가 맞물려 수많은 멜로드라마가 탄생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다분히 인터랙티브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의 영화들 중 가장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다고 볼 수 있는 는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고전 멜로드라마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직 영화감독이지만 사고로 실명을 한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중, 어느 날 라이 X라는 청년으로부터 그의 데뷔작의 시나리오를 써줄 것을 의뢰받는다. 그때부터 영화는 현재 시점인 2008년과 과거 시점인 1992년과 1994년의 세 가지 시간대를 오가며 해리와 얽힌 레나(페넬로페 크루즈)를 비롯한 인물들간의 다양한 열정의 드라마를 펼쳐놓는다. 1994년 당시 재벌 기업인인 에르네스토의 제작으로 이라는 작품(영화 속 영화)을 만들고 있던 마테오는 영화의 주연 여배우이자 에르네스토의 정부인 레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를 질투한 에르네스토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도피에 성공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이 영화는 세 가지 층위의 내러티브의 재구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마테오 블랑코의 기억과 엉망으로 편집된 이 맞물리는 마테오의 재구성, 둘째로 라이 X가 만들고 있는 마테오의 다큐멘터리에 관한 재구성,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의 전체 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가는 영화 자체의 재구성이 있다. 그런데 사실 관객은 눈 앞에서 흘러가는 영화의 이미지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 세 가지 층위에 모두 관여하면서 이야기의 퍼즐을 짜맞추게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각자의 멜로드라마를 구성할 수 있는 지위를 얻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쥬디트’, ‘디에고’, ‘마테오’와 그의 또다른 자아인 ‘해리 케인’, ‘레나’, ‘에르네스토’, ‘라이 X’ 등 많은 인물들의 관계의 조합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진다. 관객은 에르네스토의 레나에 대한 강박관념에 집중하는 동시에, 오랜 시간을 인내하면서 성취하는 쥬디트의 사랑에 동화될 수 있다. 혹은 라이 X라는 청년에 주목해서 마테오를 향한 그의 애정 고백을 읽어내도 무방하다. 이렇게 알모도바르가 빚어낸 영화적 구조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생성된다. 알모도바르의 전작인 에서 눈부신 열정을 발산했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 영화에서도 오드리 헵번, 마릴린 몬로, 소피아 로렌 등의 스타 이미지를 소환하는 뮤즈로 등장하면서 다채로운 빛깔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쥬디트 역으로 등장하는 블랑카 포르틸로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블랑카는 오랫동안 마테오 곁을 지키는 동반자적인 관계의 쥬디트로 나와 절제된 호흡으로 또 다른 축(크루즈가 영화적 환영이라면 그녀는 현실이다)을 완성한다. 쥬디트와 같이 누군가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캐릭터는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에서 로사 수녀를 간호하던 마뉴엘라나 에서 식물인간이 된 사랑하는 알리샤 곁을 지키는 베니그노가 그러했다. 그러한 캐릭터들은 성 정체성보다는 인간 안에 내재된 모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들의 모성성은 말미에 가면 항상 기적을 선사하곤 했다. 알모도바르는 멜로드라마의 모성애를 축복하고 찬미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레나가 아닌 쥬디트의 몫이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결실을 이루어 낸다. 즉 쥬디트, 그녀의 아들 디에고, 마테오의 관계에 숨어있는 진실이 마지막 순간에 밝혀진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관계’를 숙명적으로 완성하는 그 세 남녀의 신(가족의 탄생)은 실로 알모도바르의 마법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