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에 서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CULTURE

그 길에 서면

숨가쁜 일상에서 탈출해 무심코 지나쳤던 비경 속에 자신을 놓아주기. 마음의 여유를 갖고 느릿느릿 걷다 생활에서 발견하지 못한 작은 것들을 보고, 새로운 것을 보며 새로운 생각하기. 익숙한 길 위에서 낯선 반가움을 찾기. 오직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멋진 신세계, 산책의 묘미.

ELLE BY ELLE 2010.09.17


1 북촌에서는 고목의 그림자가 담벼락이 되듯이 걷는 이의 마음도 길 위에 포개진다.
2 북촌 골목은 세월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대신 옛 정취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다.

발등에 떨어진 꽃잎의 수를 세다
산책이라고 해서 외진 오솔길이나 녹음 속을 걸을 필요는 없다. 어느 길이든 두 발을 얹고 마음의 여유를 음미하면 된다. 최갑수 여행 작가와 동행한 산책이 그러했다. 발끝으로 북촌 한옥 길을 길어 올리려 현대 계동사옥 옆 계동 길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그의 표현대로 북촌문화센터에서 중앙고교로 이어지는 계동 길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났다. 길 양쪽에는 슈퍼마켓과 철물점, ‘펌’보다 ‘빠마’가 어울리는 미장원, 책받침과 딱지를 팔고 있을 법한 문방구가 모여 있었다. 세월 앞에서 이 동네는 제 고집을 부린 듯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 않아요? 도시에서는 일부러 뒤돌아봐야 볼 수 있는 풍경이잖아요. 여기에 오면 꼭 여며맸던 마음이 느슨해지고 풀려요.” 철물점 앞 녹이 든 물건들을 살피던 최갑수 작가가 계동 길 예찬론을 폈다. 10여 년 전 서울에 처음 와서 다녔던 그의 첫 직장이 이곳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과거를 복기하고 있는 계동 길이 그의 기억 속 서울의 첫인상과 가장 닮아 있을 수밖에. 앞서가는 최갑수 작가의 꽁무니를 쫓아 계동 길 끝에서 중앙고등학교를 끼고 왼쪽으로 들어서자 한옥 마을이 나타났다. “북촌은 신발을 구겨 신고 편한 복장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게 좋아요. 몸이 가벼워지면 자질구레한 걱정과 일들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거든요. 서울에서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에요.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이곳도 사라지겠죠. 그 전에 많이 와서 눈에 담고 싶어요.”라며 최갑수 작가가 카메라를 들었다. 가회동 31번지를 지나 북촌의 꼭대기에 있는 이준구 가옥에 다다랐을 때 문득 궁금해졌다. 수십 번도 더 걸었을 이 길의 무엇이 그의 발걸음을 빼앗았는지. “처마와 처마가 잇닿은 모습이죠. 처마의 능선을 따라 기와지붕이 어깨를 맞댄 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서로 어깨를 걸고 사는 한옥촌 특유의 느낌이랄까. 아파트들은 따닥따닥 모여 붙어 있잖아요.”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가 말했다. 날이 뜨거웠다. 아기 무게만한 카메라 가방을 짊어진 그의 등은 흠뻑 젖어 있었다. 더위를 피해 바닥에 길게 늘어진 처마의 그림자로 숨었다. 한옥의 친절함에 신세를 졌다. 골목의 가장 끝자락에서 왼편으로 빠져 정독도서관으로 내려오는 길. 초짜 뚜벅이가 고수에게 물었다. “산책의 묘미는 뭘까요?” “자신을 옭아맨 모든 것들을 잊고 잠시나마 자신을 무장해제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행위가 아닐까요. 길을 걷다가 발등에 떨어진 꽃잎의 수를 세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게 우리 삶에 대한 예의잖아요.”

최갑수
오랫동안 신문과 잡지에서 여행 담당 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천직이라고 믿는 여행 작가가 돼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구름 그림자와 함께 시속 3㎞> <이 길 끝에 네가 서 있다면 좋을 텐데>를 펴냈다.



1 연희동 주택가에서 잠시 시간을 버리고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오래된 골목에 들어서게 된다.
2 연희동 주택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공원에는 녹음을 병풍삼아 산책로가 이어진다.

두 발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폭염주의보가 발령된다는 일기예보에 아침 일찍 나섰다. 연희동 안방지기자 든든한 안내자인 최수진 작가를 만난 건 오전 9시. 골목을 타고 부는 바람이 귓가에 걸렸다. 연희초등학교 건너편 주택가 골목이 산책로의 시작점. 2년 전 그곳에 터전을 마련한 최수진 작가의 발길은 내딛는 족족 길이 됐다. 마당에서 클래식 공연을 했던 집, 건축상을 받은 집, 최근에 대문을 바꾼 집 등등. 담벼락과 그 너머 지붕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자기 덩치만한 배낭을 메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던 방랑벽이 동네 탐방으로 발현된 탓이다. “걷다 보면 평소에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들을 발견하게 돼요.” 평일 오전 시간의 골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 분위기를 최수진 작가는 ‘몽환적’이라고 표현했다. “주로 밤에 작업을 하고 낮에 돌아다녀서 사람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어요. 영화 세트장 같은 텅 빈 주택가를 걷다 보면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들죠..” 담벼락이 성벽처럼 연결된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안산공원에 이르는 길이 갈지자처럼 뻗어 있다. 그 길 중 하나, 녹음이 짙어지는 언덕배기에 연희문학창작촌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연희문학창작촌은 작가들을 위한 집필 공간. 아름드리 소나무 산책길로 둘러싸인 전원은 도심 한복판에 지방 향교를 옮겨다 심은 것 같았다. 창조가 무언의 고통임을 아는지 작가들이 입주한 집필 공간에는 산책자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진동했다. 고독하게 자신과 씨름하고 있을 문인들을 뒤로하고 위로 뻗어 있는 길들 중 기분 내키는 대로 하나를 택해 걸었다. 곧 눈앞으로 언덕배기를 캔버스 삼아 초록 물감으로 쓱싹쓱싹 그려놓은 공원이 나왔다. 공원 벤치에 걸터앉은 최수진 작가가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지워냈다. “작업이 없을 때 집에만 있으면 몸이 늘어지고 생기가 없어져요. 그래서 되도록 밖으로 나와요. 생존을 위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걷는 거죠. 아무리 바쁘더라도 짧게라도 산책해요.” 꽤 오래 걸었다는 생각에 시계를 보니 그녀와 동행한 지 겨우 1시간이 됐다. 매 순간 치열하고 불안하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길을 돌아 몽환적 풍경의 골목을 내려오는 사이 목덜미를 잡아채는 햇살이 뜨거워졌다. 그제야 폭염주의보가 발효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평상에서 낮잠을 자던 중 쏟아지는 햇살의 무게에 깼던 추억처럼 좋은 꿈을 꾸다 깬 듯했다. 행복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최수진
영상과 애니메이션, 드로잉을 다루는 비주얼 아티스트. 걷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좋아해 여행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1 공릉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나있는 산책길은 도심 속 쉼표 같은 곳이다.

생각을 씻고 생각을 품다
걷기 붐이 불고 있지만 산책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일부러 내어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걷기 좋은 길이 가까이에 있다는 건 도시인에게 큰 축복이다. 장연정 작사가가 거니는 산책로는 아파트 옆으로 절묘하게 나 있다. “특별히 스케줄을 정해놓고 산책하지는 않아요. 오늘,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나가죠. 날씨가 좋을 때는 더더욱 그래요.” 그녀의 말처럼 산책은 날씨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데 약속한 날, 날씨가 문제였다. 온종일 멀쩡하던 하늘에 굶주린 구름이 몰려들더니 비를 토해냈다. 산책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녀를 만나 비를 피한 뒤 산책의 기술을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며칠 후 그녀가 일러준 것들을 떠올리며 그 길에 섰다. 그녀도 혼자 걷는 게 좋다고 했다. “힘들고 지칠 때 혼자 걸으면 잠시 고민을 잊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답이 나오기도 해요. 산책하면서 생각을 버리기도,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걷기는 일종의 치유다. 그녀의 표현대로 상처를 받을 때면 산책하면서 품 가득 조용히 나무를 껴안으면 되는 거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태릉입구역 근처 중랑천 옆에는 풍림 아파트가 있고 그 사이 방음벽이 일렬로 심어져 있었다. 방음벽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파트와 방음벽을 좌우로 두고 400m가량 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잣나무도 보였다. 도심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를 만난 자리에서 산책과 어울리는 음악을 추천해 달라고 졸랐다. 몇 가지를 알려줬지만 정작 자신은 음악을 듣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산책하면서 듣는 소리들이 너무 좋아요.  아파트 옆을 바로 걸으니까 그릇 부딪히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 가족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들이 들려요. 아주 평범할 수 있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져요.” 평소 같았으면 귀에 이어폰을 꼿고 산책했겠지만 그날 만큼은 그녀의 팁 대로 주변 소리에 집중했다. 방음벽 너머 차들이 내달리는 소리와 뜨겁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사이로 서서히 사람 사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듯싶었다. 일상의 흔적을 간직한 이 길은 장연정 작사가가 약소하게 걷는 산책 코스. 기분이 내키면 잣나무 길의 끝에서 왼편으로 있는 굴다리를 통과해 서울산업대를 거쳐 불암산 산책로에 오른다. 도시에 뿌리를 둔 길이 활엽수와 소나무로 우거진 산길과 입을 맞추는 지점이다. 숲길은 삼육대학교의 인공호수인 ‘제명호’까지 이어진다. 모두 2시간이 넘는 거리. 제명호를 빙둘러 내려오는 길에 전화벨이 울렸다. 유리 같은 정적이 깨졌다. 아뿔사, 산책길에 휴대전화를 챙겨 가더라도 무음으로 해놓는다는 그녀의 말을 잊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자신의 책에 쓴 문구가 떠올랐다. ‘알고 있다. 한 템포 느리게 시간에 순응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가능한지를.’ 잠시라도 나를 완전하게 놓아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장연정
늦은 오후의 산책처럼 지친 마음에 휴식을 주는 노랫말을 짓는 작사가. 음악만큼 여행하길 사랑해 여행 기록을 담은 <소울 트립> <슬로 트립>을 냈다.



1 백사실 계곡에서 빠져나와 부암동 골목을 걷다 보면 서서히 도시로 회귀하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2 백사실 계곡 길목에 있는 카페 ‘산모퉁이’.

비밀의 정원을 거닐다
“누구나 하나쯤 비밀의 화원을 갖고 있어요. 달콤한 케이크와 향이 진한 커피가 그러하듯 울적한 기분을 풀어주는 자신만의 공간을 말이죠.” 아름지기 문화재단 배지운 기획실장의 말이다. 그녀가 이끈 곳은 서울의 비밀의 화원이라는 백사실 계곡. 북악산 기슭으로 흰 돌이 많고 절경이라 ‘백석동천’이라고도 불린다. 그녀는 날이 좋으면 청와대를 지나 환기미술관에서 시작하는 북악산 산책길을 따라 백사실 계곡까지 걷는다고 했다. 그날은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낮이 길어 오후 5시가 넘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를 이길 여력이 없었다. 계곡 초입 부근까지 차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려 골목을 걷다가 샛길로 빠져 들어갔다. “어라?” 당황한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 한적한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눈앞에는 산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짙푸른 숲길이 드리워져 있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아한 물소리는 계곡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공기부터 다르죠?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해요.” 배지운 실장이 고즈넉한 숲길을 앞장섰다. 나뭇가지들이 하늘 높은 곳에서 우산살처럼 뒤엉켰고 짙은 초록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여름 햇살을 튕겨냈다. “마음이 공허해지고 도시 밖으로 나가고 싶단 생각이 들 때면 자주 와요.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좋지 않았을 때 오면 마음이 정화되더라고요.” 건축학도였던 그녀는 옛 별장터가 있다는 얘기에 끌려 이 비밀스런 계곡에 관심을 갖게 됐다. 50보 정도를 더 내디디니 그녀를 홀렸다는 별장 터가 나왔다. 늙은 느티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는 옛 집터와 연못, 정자의 주춧돌이 있었다. 연못은 원래 집터였던 자리에 물이 찬 거라고, 이곳에는 백사 이항복이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유래가 있다고 배지운 실장이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이 비밀의 정원에서 낭만과 흥취,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 그들만의 무대를 갖기도 했다.  “이곳이 너무 좋아 친구들에게 소풍을 오자고 했어요. 그런데 놀 때 음악도 있으면 좋겠단 누군가의 얘기에 악기를 다루는 사람, 시조창을 하는 사람,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합세했죠.” 그녀가 가르킨 고목 주위로 돗자리를 펴고 누워 음악을 곱씹고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백사실 계곡을 빠져나와 차로 올라왔던 길을 두 발로 걸었다. 바퀴에 몸을 실어 내려갔다가는 확 바뀐 세상 풍경에 자연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마음이 놀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금빛 저녁 햇살이 담벼락에 닿아 조각조각 부서졌다. 그 반짝임이 부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자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내달리는 세상이 열렸다.

배지운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는 ‘아름지기 문화재단’의 문화산업 기획실장. 새로운 길을 발견할 때면 몇 시간이고 헤매며 탐험하는 뚜벅이 기질이 발동된다.


중략.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9월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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