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과 작별을 고하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떤 건 뉴욕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소호의 편집 매장과 빈티지 숍들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것들을 집어들고 걸쳐댔던 공격적인 여행이 끝내고 남은 건 허무함뿐. 쇼핑이 삶의 목표인 양 하는 내가 싫어질 참이었다.::쇼핑,계획,엘르,엣진.elle.co.kr:: | ::쇼핑,계획,엘르,엣진.elle.co.kr::

쇼핑과 작별을 고하다 스스로를 쇼핑에 꽤 무심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한 ‘살 만한 집 찾기’ 프로젝트는 장장 두 달 만에 가로수길에서 완성됐다. 옷가게와 카페로 빽빽한 동네지만 그때는 그것도 활기차고 좋게 보였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매일 바뀌는 동네 숍들의 디스플레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를 발견했다. 컴퓨터를 켤 때마다 온갖 쇼핑몰의 장바구니에 담긴 품목들을 살펴보며 결제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렇게 한번 발을 들여놓은 ‘쇼핑 중독의 세계’는 출구도 없는 블랙홀이었다. 쇼핑과 나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연애 중에서도 가장 재미없고 가장 자존심 상하는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정말 내가 쇼핑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쇼핑이라는 행위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최면을 건 것은 아닌지 알기 위해 비장하게 1년간의 냉각기를 선언했다. 이번만은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를 것 같은 마음가짐으로 2010년 새해 아침에 씩씩하게 ‘굿바이 쇼핑’을 외쳤다. 천사와 악마 사이신년 계획을 세우는 모든 이가 그렇듯 나 역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변화를 갈망하는 욕구로 똘똘 뭉쳐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적금통장(그것도 만기된!)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처럼 공돈이 생긴 기분도 들었다. 일단 ‘굿바이’할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이미 입을 옷은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더 이상 옷은 사절. 얼굴이 뻣뻣해질 지경이 아니고서는 화장품도 안녕이다. 좀 더 배짱을 부려 일상생활 용품 중 휴지나 치약처럼 꼭 필요한 생필품이 아닌 품목들은 모두 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 했던가. 발레리나의 목선보다 꼿꼿했던 나의 의지는 3일도 안 돼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4년을 인도네시아라는 따뜻한 섬나라에서 보내다 한국에서 겨울을 나게 됐다는 게 문제. 두피 세포까지 얼릴 듯 맹렬하게 추운 날씨에 반해 나에겐 따뜻한 겨울 옷이 없었다. 미쉐린 인형처럼 보이는 것마다 껴입고 몇 년간 묵혀뒀던 블랙 코트로 마무리한 다음 빙판길을 나설 때마다 “생사가 걸린 문제잖아. 따뜻한 겨울 코트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아? 좋은 소재에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코트는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생필품이라고!”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 건강을 염려한 천사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를 돌비 사운드로 번갈아 들으며 도착한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의외의 얘기를 들었다. 한 친구가 어깨가 삐죽 튀어나온 내 블랙 코트를 보더니 발맹과 파워 숄더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 “이거 4년 전에 산 코트인데 팔에 살이 쪄서 이제 어깨가 안 맞는 것뿐이야.”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내 구닥다리 코트가 트렌드 아이템일 줄이야! 이 코트 한 벌로 겨울을 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인공의 생일 선물로 내놓은 책(물론 한 번 슬쩍 읽었던)과 소장품도 반응이 좋았다. 이런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한 친구는 감격스런 제안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 밀리터리 점퍼를 하나 새로 구입했으니 그 동안 입던 다른 점퍼를 내 생일 선물로 주겠다는 것. 물론 생일이 되려면 한 달 이상 남았지만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게 안쓰러우니 미리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남이 입던 옷일지라도 새 물건이 주는 효과는 엄청났다. 쇼핑 욕구를 대리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은 새옷 못지않았으니 말이다. 친구의 체취가 남은 것도, 한쪽 주머니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 밀리터리 점퍼를 입고 집 근처의 아담한 도서관에 가서 회원증을 만들었다. 2주에 한 번, 먼지 쌓인 책을 다섯 권씩 보물처럼 껴안고 집으로 돌아와 읽는 것을 반복했다. 책은 자고로 서점에서 산 뽀송뽀송한 것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낡은 책을 읽고 있자니 오래된 현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현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쇼핑에 들이던 돈과 시간을 아낀다는 기쁨에 들떠 몇 달을 보내자 한강에는 벚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이젠 얼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장장 사흘에 걸친 옷장 정리가 끝난 후 나에게 남은 건 추운 겨울날 생사의 기로(!)에 서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의 절망이었다. 옷을 먹는 괴물이 사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채워도 채워도 옷장 속에는 입을 옷이 하나도 없냐는 말이다! 지난해 틈틈히 샀던 모든 옷들은 지독히 ‘지난해’스러웠다. 트렌드를 좇으려는 나의 욕망과 현실과의 간격이 극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친구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늘어놨더니 그녀 역시 입을 옷이 없다며 징징거렸다. 입을 옷이 없다는 건 모든 여자들에게 새로울 것도 없는 고민이지만 쇼핑을 멀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더 크게 다가왔다. 그날 밤 바닥난 아이 리무버 대신 코코넛 오일로 아이라인을 지우며 생각했다. 내 것이 아니다. 앞으로 알렉산더 왕의 ‘로코 미니 더플 백’이라는 이름 따위는 룩셈부르크의 방언쯤으로 생각하자. 그 순간 귓가에서 지난 몇 달 동안 웅웅거리던 모기 한 마리를 잡은 것처럼 짧고 깊은 쾌감이 느껴졌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수십억의 사람들이 사는 지구에서 나와 비슷한 고진감래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Buy Nothing Day’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선 크림의 자외선 차단지수를 체크하게 되는 쨍쨍한 어느 여름 한낮이었다. 상품을 생산하는 것부터 소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 자원 문제, 노동 문제, 불공정 거래 등의 폐단을 고발하고 유행과 쇼핑에 중독된 현대인의 소비 문화를 반성하는 내용의 캠페인으로 해마다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단순히 지갑을 집에 숨겨놓고 쇼핑 욕구를 참는 사람부터 하루 종일 빈 카트를 몰고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수고스러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의 굿바이 쇼핑족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생각해보니 내가 살던 발리에도 딱 하루지만 그런 날이 있었다. 힌두력을 쓰는 발리의 새해는 3월에 시작하는데 이를 기념하는 침묵의 날인 ‘녜피’ 때는 거리를 오가는 것도, 전기를 쓰는 것도 금지된다. 녜피 전날엔 몇 달 동안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악마 형상인 ‘오고오고’를 앞세워 퍼레이드를 한다. 발리에 사는 모든 악귀와 나쁜 영혼들을 담은 오고오고를 바닷가에서 태운 다음 바다로 보내진 그 영혼들이 다시 돌아올 길을 찾을 수 없게 바깥 출입도 삼가고 등불은 끈 채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 고요한 하루는 마치 인생의 뒷면을 슬쩍 훔쳐보는 듯 묘한 경험이었다. 그때 오고오고의 뿔난 머리와 함께 태워버렸어야 할 것은 바로 현대판 악귀인 ‘지름신’이었다. 아무튼 쇼핑과 작별을 고한 지 벌써 7개월. 이쯤에서 슬쩍 고백하자면 옷을 사는 대신 기분 전환을 위해 화분을 몇 개 사서 베란다에 두기도 하고 빳빳한 종이의 냄새와 질감이 그리워 새 책도 몇 권 구입했다. 쓰다 처박아둔 지 꽤 된 토너를 찾아서 쓰다가 얼굴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유기농 브랜드의 토너도 새로 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기만 하면 매일 한 시간씩 걷는 건 문제도 아닐 것 같은 R 모 브랜드의 운동화(발끝부터 엉덩이까지 톤업된다는)가 심신이 건강해진다는 차원에서 생필품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는 걸 봐선 완벽히 지름신에게서 벗어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무모하고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치고는 비탈진 오르막과 그늘진 평지를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꽤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답 없는 휴대전화를 쥐락펴락하기를 수십 번하던 가련한 짝사랑에서 “내일 시간 어떠냐?”는 그의 연락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슬쩍 가리고 바쁘다고 한 번 튕겨보는 정도의 관계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작은 것부터 대안을 찾으며 여유롭게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해 나가는 것으로 조금은 풍성해진 일상이다.*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9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