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가 돼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소녀, 여자가 돼라!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의 외침이다. 하지만 베이바가 레이디로 거듭나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어?” 어느 뉴요커가 물었다. “치아가 못생기면 일본 여자.” 나의 대답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미니드레스에 레깅스를 입은 게 한국 여자야. 아니면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거나. 도대체 너흰 레깅스와 스트라이프 셔츠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낸들 아나. 한국 여자들은 다 우월한 다리를 가졌나? 모두가 얼룩말보호협회 회원들이고? 농담이다. 진짜 이유는 나도 안다. 미니드레스, 그 중에도 레깅스와 어울리는 건 콕 집어 베이비 돌 드레스다. 베이비 돌과 레깅스의 조합은 편리하고 안전하다. 언젠가 20대 남자 배우를 인터뷰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꾸미지 않고도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여자가 좋아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 가장 섹시하죠.” 이번엔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거야말로 여자들에겐 잔혹한 시선이죠. 청바지와 티셔츠가 어울리려면 몸매가 정말 좋아야 하거든요. 옆구리살, 뱃살, 처진 엉덩이를 가려줄 게 하나도 없잖아요. 반면에 베이비 돌 드레스 같은 걸 입으면 대부분 여자들의 약점인 토루소 부위가 완벽하게 가려지죠.” 그때만 해도 난 푸시업 브래지어와 하이힐 이후 최고의 패션 발명품인 기능성 다단계 압축 레깅스의 존재를 몰랐다. “다리만 날씬해도 참 좋겠어. 별 고민 없이 레깅스에 원피스만 걸쳐도 갖춰 입은 것처럼 보이잖아”라고 한탄하던 코끼리 다리 친구는 기능성 레깅스를 발견한 이후 서울을 뒤덮은 ‘끌로에 걸’ 넘버 97982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가슴과 엉덩이는 빈약하고, 옆구리와 뱃살은 풍만하며, 다리는 보통인 한국 여자들에게 베이비 돌 드레스는 신의 은총이었고, 지난 몇 년은 그들의 화양연화였다. 여자들이 아무리 비겁하다고 욕해도 남자들이 키높이 깔창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들 역시 아무리 내복 같다고 놀려대도 레깅스를 향한 사랑은 깊어만 갔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난 베이비 돌 원피스와 레깅스의 조합에 대해 냉소적인 편이다. 시도해본 적은 있다. 실크 베이비 돌 원피스와 레깅스에 플랫 슈즈를 신고 말간 민낯에 생머리 찰랑대는 소녀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가슴에 핀턱 장식이라도 돼 있으면 더 좋고. 그러나 내가 그런 걸 입으면 베이비나 소녀는커녕 베이비에게 수유 중인 임산부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대부분의 한국 여자들은 모르는 C컵 가슴의 불편함에 대해 한 수 알려 드리자면 복부가 조이지 않는 헐렁한 상의를 입으면 커다란 가슴과 배 사이가 온통 살로 가득 차 신체 사이즈가 40-40-40쯤 돼 보인다. 그러니 옆구리살이 툭 불거지더라도 차라리 타이트한 상의를 입는 게 낫고, 허리띠라도 하나 둘러서 상체와 하체를 분리해주는 편이 덜 미련해 보인다. 소재도 하늘하늘한 것보단 약간 힘이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사실 가슴뿐 아니라 목 보다 두 배쯤 더 두꺼운 다리, 부스스한 곱슬머리, 혈색 없는 민낯 등 나의 모든 것이 이상적인 끌로에 걸과는 거리가 멀다. 다년간의 실험 결과, 난 자신이 레깅스보단 스타킹, 플랫 슈즈보단 하이힐, 민낯보단 짙은 스모키 아이, 생머리보단 뇌쇄적인(?) 웨이브 헤어가 어울리는 여자란 걸 알아버렸고, 그 결과 세상 여자들을 두 가지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성인용’과 ‘아동용.’ 말하자면 나는 성인용 보디를 가진 여자인 거다. “제가 왜 연애를 못하는지 오빠들한테 물어봤는데요. 저한테는 섹슈얼한 느낌이 없대요. 그래서 메이크업을 해봤어요.” 미니어처를 만들어 휴대전화 고리로 쓰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후배가 말했다. 모처럼 만난 그녀는 처음 보는 짙은 눈화장을 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대체 너처럼 예쁘고 착한 애가 왜 연애를 못하니? 남자들이 다 눈이 삐었어”라고 등을 토닥거렸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베이비 돌과 레깅스, 플랫 슈즈가 어울리는 소녀 같은 이미지, 슈즈 밑창만큼이나 플랫한 몸매, 어딜 보나 그녀는 ‘아동용’이다. 아무리 짙은 아이라인을 그린다 해도. 그제야 난 성인용 체형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금단의 열매인 베이비 돌 드레스에 대한 동경 따위 영구 삭제하고, 성인용 체형에 걸맞은 성숙한 룩을 찾아다니기로. 내돈 주고 산 첫 번째 스커트는 A라인의 화이트 데님 스커트였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다. 학창 시절 나보고 스커트 좀 입어보라며 보채는 남자 선배에게 팬 서비스 차원에서 반바지 입은 모습을 보여줬다가 “두 번 다시 다리 내놓지 마라”는 실망 섞인 경고를 들은 후 스커트는 영영 접었더랬다. 그런데 한 번 스커트를 입기 시작하자, 그 편하고 좋은 걸 여태 멀리하고 산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뭐, 가운데 여밈이 버튼으로 돼 있는 스커트를 보고 많은 남자들이 날 무릎에 앉혀놓고 그 단추들을 하나하나 풀고 싶은 도전의식을 느꼈다는 얘기는 굳이 믿어달라고 하지 않겠다. 외출 금지령을 받았던 다리들은 어떻게 했냐고? 키 180cm짜리 모델들조차 하이힐을 신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야오밍과 하승진보다 높은 데서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베르사유 궁전에 사는 것도 아닌데 오물 밟기 싫어서 신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게다가 무릎 약간 아래로 떨어지는 스커트는 의외로 다리를 날씬해 보이게 한다. 내친김에 적극적으로 성인용 룩을 찾기 시작한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은 빌어먹을 베이비 돌 열풍이었다. 값싸면서 싼티 나지 않는 예쁜 드레스는 죄다 베이비 돌이었다. 이봐요, 세상엔 롤리타 코스프레를 하고 성인 남자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일 따위엔 관심 없는 여자도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소위 ‘강남 텐프로’ 밀집 지역인 논현동과 역삼동 경계에 사는 터라 동네 옷가게에는 매끈매끈한 재질의 타이트 스커트들이 잔뜩 있었지만 실크 블라우스와 함께 입지 않으면 의미 없을 듯한 그 스커트들은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잘못 입으면 회의실 탁자에 눕혀놓고 블라우스를 찢어발기고 싶은 완벽한 여비서 룩이 될 테니까. 그러던 차에 그분들이 오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들. 외투 주머니나 가터벨트 속에 권총 한 자루쯤 감추고 있을 것 같은 1940년대 레이디들 말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난 도나 카란이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다. 만날 똑같은, 지루한 옷만 만드는 직장 여성용 유니폼 제작자라고. 하지만 1940년대 레이디 룩이 화두로 떠오른 2009 F/W 런웨이를 보는 순간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우아하게 무릎을 휘감는 H라인 블랙 스커트, 도나 카란 특유의 파워 수트에서 변형된 각진 어깨의 레드 재킷, 가는 블랙 벨트의 조합은 성인용 체형을 가진 여성이 나아갈 바를 명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적이고 강인하면서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겸비한 룩이었다. 그보단 스커트가 짧고 어깨도 둥그스름한 프라다, 좀 더 하늘하늘 여성스러운 보테가 베네타나 랑방도 좋지만 역시 낭창함과는 거리가 먼 내가 소화하기론 절도 있는 도나 카란 룩만한 게 없겠다. 또 다른 베스트를 꼽자면 옛날 사립학교 교복 같은 루이 비통의 A라인 스커트와 블라우스, 쇼트 카디건 조합. 대놓고 “난 육감적인 40년대 레이디에요”라고 광고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매력적이다. 막상 입어본 느낌은 루이 비통의 압승. 엉덩이에 레이스가 달린 랑방의 울 소재 펜슬 스커트는 예쁘긴 했지만 소재가 너무 까칠해서 슬립을 입어도 따끔할 것 같고, 아르마니의 하이웨이스트 스커트는 허리와 엉덩이로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라인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배 쪽을 더블 버튼으로 여미게 돼 있는 버버리의 새틴 스커트는 업소 언니들의 생활 패턴에 맞춰 주로 야간 영업을 하는 우리 동네 숍에서 많이 본 옷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루이 비통의 그레이 톤 A라인 스커트는 소재부터 디자인, 피팅감 모든 게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40년대풍 스커트를 맞이하기 위해 이미 옷장에 사다놓은 자주색 아가일 무늬 니트 카디건과도 잘 어울릴 것 같다. 항상 그렇듯 아름다움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이번 아름다움은 무려 1백90만 원짜리다. 역시 자라나 둘러봐야겠다며 침울한 기분으로 에비뉴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순간,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 쌓아둔 옛날 옷 박스 어딘가에 그런 스커트가 있다. 예전 룸메이트가 자동차 외판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동대문에서 산 울 스커트다. 그녀는 거기에 블랙 터틀넥 니트와 롱 코트를 매치했다. 그 어설프고 답답하고 지루한 직장 여성 룩 때문인지 그녀는 석 달 동안 자동차를 한 대도 팔지 못하고 쓸쓸히 낙향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H라인 블랙 울 스커트를 내 옷장에 남겨둔 채.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의 가르침 덕에 그 스커트에겐 아무런 죄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문제는 아우터다. 난 당장 베란다로 달려가 10년 동안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스커트를 꺼냈다. 무릎 아래 찰랑거리는 밑단, 높은 허리선, 복부와 엉덩이는 부드럽게 조여주고 허벅지 중간부터 여유롭게 떨어지는 H라인,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 딱 도나 카란이다. 배가 엉덩이만큼이나 토실토실하고 봉긋해서 신라 왕릉처럼 보인다는 게 아쉽지만 그쯤이야 카디건이나 아우터로 가리면 된다. 짧고 풍성한 재킷과 가는 벨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하이힐, 이게 좀 문제인데,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엄마에게 실업 급여나 받는 무직자 주제에 펜슬 스커트와 하이힐을 신고 다닐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출근할 오피스가 없는데 오피스 룩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아무래도 지난주 이태원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군화처럼 생긴 레이스업 부츠를 사야겠다. 5cm쯤 굽이 있어서 걷기도 편하고, 치마 아래 다리가 한 뼘 밖에 안 남아 안짱다리 호호아줌마처럼 보일 염려도 없고, 성인 여성용 보디와 예비역 남성의 강직함(?)을 겸비한 나의 정체성과도 맞아떨어진다. 내가 ‘롱 & 린 실루엣’인지 뭔지 하는, 종아리 절반까지 오는 도톰한 새틴 스커트를 입고 낮은 굽과 어울리는지 보겠다며 하이힐을 벗어던지자 천지개벽한 듯 놀란 얼굴로 달려와 당장 하이힐 위로 돌아가라 다그치던 에비뉴엘 마크 제이콥스 매장 점원이 보면 또 기겁을 하겠지만 말이다. 박스에서 찾아낸 스커트에 연보라색 꽃무늬 블라우스, 자주색 니트 카디건을 입고 거울 앞에 서 본다. 단정한 머리가 어울리겠다. 짧은 머리를 가까스로 틀어 올린다. 다리 길이가 손가락만해 보인다. 급한 대로 힐 8cm짜리 메리제인 슈즈를 신어본다. 이것만으론 좀 지루할 수도 있지만 메이크업을 하고, 디테일이 재미난 재킷을 입으면 달라질 것이다. 모처럼 흡족한 기분이다. 그때 벨이 울린다. 무거운 고양이 사료와 모래를 나르느라 우리집에 올 때마다 몸살이 날 지경이라고 불평하는 단골 택배 아저씨다. 늘 나의 ‘추리닝’과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만 보던 아저씨가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라고 외치는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얼굴로 말한다. “아, 선생님이신가 보다?” 젠장, 젠장, 젠장! 상의를 바꿔야겠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쫙 달라붙는 셔츠나 하늘하늘한 실크 블라우스로. 내가 어깨 뾰족한 도나 카란 재킷 사는 날 보라고! 이게 40년대 레이디지 어딜 봐서 사감 선생님 룩이냐고! 젠장. 그날 결심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박스씩 고양이 모래를 주문하기로.*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0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