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독회에 가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목소리를 통해 읽혀지는 순간, 평면에 붙어 있던 시(詩) 속의 문자들은 살아나 공명하며 마음을 건드린다. 다음은 낭독회에 가길 좋아하는 한 에디터의 사적인 고백이다.::시,엘르,엣진,elle.co.kr:: | ::시,엘르,엣진,elle.co.kr::

낭독, 활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다음은 지난해 6월의 일기 한 조각. ‘이 순간, 남한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KBS 진행자 최원정 아나운서라고 답하겠다. 지난 월요일, 앞 못 보는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점자로 쓰여진 ‘아들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을 때 나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눈물을 훔치던 진행자를 질투했다’ 아무도 TV 앞에 앉을 것 같지 않은 월요일 한밤중에 방송되는 . 그 무대에는 소리꾼 이자람과 래퍼 타이거 JK, 소설가 신경숙과 가수 이적. 작가 황석영과 가수 이은미 등 다소 낯선 조합의 손님들이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나란히 무대에 앉아 번갈아 글을 읽는다. 소설 혹은 시, 때론 일기나 편지의 글귀들이 잔잔한 음악과 뒤섞여 공기 중에 흩어진다. 이순재가 정지용의 를 낭독하고, 개그우먼 박지선이 김승옥의 을 들려주고, 양동근이 성경 구절을 읽는 모습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하고 낯선 장면이다. ‘말’이 아닌 ‘글’을 듣는 일, ‘낭독’에 관한 나의 첫경험은 을 만나기 훨씬 전, 좀 의외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2007년, 라는 프로그램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코너. 연예인들이 나와 책의 일부를 읽는, 뭐랄까 시끌벅적한 요즘 예능 박자와는 맞지 않는 엉뚱한 코너에서였다. 배우 예지원이 등장해 김소월의 을 읽기 시작했다. “붉은 해는 서산머리에 걸리었다 /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 떨어져 나가앉은 산 위에 /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그녀 특유의 과장된 말투와 표정. 그리고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좀 기묘한 장면이었다. 기세를 꺾는 법이 없는 그녀, 낭독을 이어갔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낭독이 끝나자 진행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브라운관 밖의 나는, 어쩐지 울컥하였다. 글을 듣는 즐거움에 빠지다낭독의 즐거움을 어설프게 맛본 뒤, 처음 시도한 것은 웹사이트를 통해 낭독을 듣는 일이었다.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직접 읽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이트(한국문화예술협회에서 운영하는 문장 웹진, www.munjang.or.kr)에 접속해 오래전의 자료까지 집요하게 뒤적거렸다. 작가의 들숨과 날숨 사이의 미묘한 떨림까지 감지할 수 있는, 오, 신기하고 놀라운 세상! 음흉스럽게 시인들의 ‘소리’를 찾아다니던 중, 평소 좋아하던 시인의 낭독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마음이 덜컹 동했다. 하지만 시 낭독회라니 이 얼마나 ‘척’하는 취미인가! 솔직히 말해 시에 관해서라면 일단 ‘잘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시 좋아하세요?”란 질문은 마치 “클래식 음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과 같아서, 어지간해서는 아는 척하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먼저 고개를 드는 것이다. 몇 연 몇 행의 작품이냐, 주제는 무엇이고 소재는 무엇이냐, 이 구절에서 시인은 뭘 말하고 싶어 했냐, 따위의 학습을 해온 우리에게 시란 늘 어렵고 좀 고상한 것 혹은 ‘척’하는 것이었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조금 있었다. 버스에서 시집을 펴는 일은 왠지 허세 섞인 짓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잠들기 전 홀로 방안에서 읽을 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읽지 않았다. 따라서 시 낭독회 참석은 제법 큰 용기가 필요했다. 누구와 가야 하나, 뭘 입고 가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 끝에 결국 홀로 조용히 낭독회 장소를 찾았다. 시인 김소연과 김민정이 각자 최근에 뱉어낸 자신의 따끈따끈한 언어를 낭독했다. 그리고 서로의 시를 읽었다. 몇몇 독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녀들의 시를 읽었다. 영화보다, 소설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마음을 울리는 두 시간이었다. 지난해 겨울의 일이었다. 노시인이 들려주는 노래 지난달 9일, 홍대 근처에 위치한 작은 카페.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마종기 선생의 시 낭독회를 찾았다. 작은 가게로 들어서자 루시드폴의 노래가 먼저 인사한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어도 나는 하늘을 날으네’ 동화작가 마해송의 아들. 의사 출신의 시인. 루시드폴의 조윤석과 2년 동안 주고받은 이메일을 모아 책을 낸 사람. 작가에 관한 정보는 얄팍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 본다. 일단 성별은 9할이 여성. 그녀들 대부분이 젊은 층에 속한다. 시인 지망생이거나 혹은 작가의 지독한 팬이거나 둘 중 하나인 듯 보였다. 한쪽 구석에는 작가의 지인으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한 몇몇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전 출간된 작가의 시집 의 편집자가 나와 낭독회의 시작을 알리며 시 한 편을 낭독한다. “(중략) 큰 강의 시작과 끝은 /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중략)” 팬들이 사랑하는 마종기의 시 중 결코 빠지는 법이 없는 ‘우화의 강’이었다. 그 이후의 시간은 작가 인터뷰와 시 낭독으로 채워졌다. 선생이 자신의 작품 중 ‘수련’과 ‘갈릴레오 호수’를 읽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가의 이야기. 학교에서 글을 배우지 않은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계기에 관해, 시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자신의 아내에 대해. 외국에서 살아가는 고단함에 관해, 위로하는 시를 쓰게 된 이유에 관해 말한다. 나머지는 독자들을 위한 시간. 남산 밑에 산다는 20대 아가씨가 ‘호두까기’를 읽고, 김포에서 온 직장인이 ‘네팔에서 온 편지’를 읽었다. 지난해 이라는 시집을 들고 같은 장소에서 낭독회를 진행했던 작가 김병률이 구석 자리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쭈뼛거리며 등장해 ‘익숙지 않다’를 낭독했다. 그렇게 대략 열 편 정도의 시를 함께 읽은 후 낭독회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낭독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일’을 뜻하나 그것은 음독(音讀)과는 다른 의미를 품는다. 똑같이 소리 내어 읽는 일이지만 시는 ‘낭독’한다고 하고 신문은 ‘음독’한다고 한다. 음독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낭독은 문학 작품을 재탄생시키는 일이다. 시인 도종환은 낭독에 관해 ‘활자로 된 책 속에 생생한 생명력을 얹는 일’이라 했고 소설가 은희경은 ‘글은 낭독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 시를 소리 내어 읽거나 그것을 듣는 일은 시집을 들추며 흘깃거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시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는 일이다. 시인의 혀를 노래하는 일(김소연, 당신의 혀를 노래하다)이다. 2005년부터 꾸준히 ‘낭독의 밤’을 진행해 온 ‘문학과 지성사’의 편집자 이근혜 과장은 말한다. 문학 작품은 낭독을 통해 거듭난다고. 특히 시의 경우에는 소리로 전해지는 울림과 공감이 탁월하다고. 낭독의 즐거움에 관해서는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 뻔한 말이지만 낭독의 즐거움은 해보지 않고는 짐작할 수 없다. 작가의 혀가 나의 혀가 되는 일을 경험할 때의 전율이란, 내 소리를 타고 또 다른 울림이 되는 것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의 기쁨이란, 이 짧은 기사로 전달하기 어렵다. 무뚝뚝했던 내가 애인에게 뻔한 고백 대신 중에서)>라고 고백하게 될지, 내 주변의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