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도 못할 거면서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아침 출근길엔 인상이 항상 찌푸려져 있고, 회사에서 당한 억울한 일과 마뜩잖은 연봉에 화가 치솟는다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계속 회사에 다닐까?::직장인 사춘기,리처드 라야드,제임스 퍼링,엘르,엣진,elle.co.kr:: | ::직장인 사춘기,리처드 라야드,제임스 퍼링,엘르,엣진

업무 전성기 다음에 찾아오는 직장인 사춘기“우리도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둘은 한참이나 깔깔 웃었다. 증권사 6년 차. 이 회사 전용 스터디 모임에서 족집게 공부까지 해서 들어온 회사였다. 증시가 마무리된 후 옥상 휴게실에서의 티타임. 둘은 자리에 앉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사에 대한 불만, 동료들의 험담, 업계 루머를 랩처럼 주고받았다. “우리의 커리어는 어떻게 될까,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라는 푸념과 함께. 그러다 문득 아쉬운 쪽은 회사가 아니라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사실 그렇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시장이 벌써 몇 년째다. 취업 준비 과정도 복잡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 드디어 취업에 성공하면 이 시대 전도유망한 젊은이 축에 낀 것 같은 기쁨이 출렁일 수밖에. 점점 돈을 버는 즐거움도 느낀다. 택시 미터기 요금이 1백원 단위로 올라갈 때마다 지갑의 돈을 헤아려 보거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시킬 때 머릿속으로 암산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이런 의기양양함은 오래가지 않는다.지난해 미국의 실업률은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에 국한된 얘기는 아닐 터. 글로벌 경제위기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오직 취업이라는 화두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그럼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아니, 경제기관 ‘Conference Board’가 50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직업만족도 역시 최저치로 나왔다. UK에 따르면 “우리들 중 48%는 직장에서 불행하다”고 느낀다. 면접관 앞에서 “한 번만 뽑아주십쇼” 하고 애걸복걸하던 마음은 대체 언제부터 변한 걸까?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5년 차 이상의 남녀 직장인을 대상으로 물어본 바에 따르면, 10명 중 9명이 “업무 전성기가 있다.”고 답했다. 이유는 “스스로 일이 즐겁다”(60%)는 게 압도적이었다. 그 다음은 “승진해서”(16%), “팀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순조롭다”(12%), “연봉이 파격적이어서”(7%) 순. 즐겁게 열심히 일하던 시절은? “1~3년 차”라는 답이 가장 많았고(42%), 그 다음이 “3~5년 차”(32%)였다. 이때가 지나면 일에 대한 흥미와 재미는 뚝뚝 떨어진다. “일이 만족스럽지 못해서”(36%), “업무가 익숙해서 지루하다”(25%)는 게 주된 이유다. ‘나는 행복한가?’ ‘이 일은 내가 꿈에 그리던 그 일이 아닌데…’ ‘내 삶은 어디로?’ 몸은 책상에 앉아 있어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춘기적인 고민에 싱숭생숭하게 마련. ‘잡코리아’ 서베이를 보면 이럴 때 “이직을 고려”(48%) 하거나 “업무와 사내 변화들에 시큰둥하게 일관”(32%) 한다. 하지만 아예 일을 그만두는 사람은커녕 이직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회사와 애증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데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크다. 지난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직장에 다니는 이유는 경제 자립과 가족, 노후 순이었다. 결국 이 세 가지는 모두 돈으로 통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회사를 못 떠나는 데는 각자 속사정이 더 있다.직장이 싫어도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 CASE 1 곧 죽어도 커리어 우먼“여태껏 ‘똑순이’로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곧장 회계사 시험 공부에 몰두해 단시간에 합격했고, 좋은 회사에서 제안을 받아 취업도 금방 했다. 부모님뿐 아니라 남자친구(지금은 남편)까지 기특하고 대견하게 여겼다. 선후배와 친구들은 나를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으로 보면서 부러움을 표했다. 클라이언트들도 내 업무 능력에 만족해 했고, 나를 롤모델로 삼는 후배들도 하나 둘씩 늘어갔다. 여기에 ‘일하는 며느리’ ‘전문직 며느리’에 대해 자부심 넘치는 시부모님까지. 반복적인 업무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지만 일을 그만둘 순 없다. 곧 태어날 아이 양육비도 걱정이지만 무엇보다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 이미지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명함 한 장 없이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33세, 회계사)CASE 2 일터에 살어리랏다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제일 바쁜 애로 통한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밤낮 없이 회사에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친동생 결혼식에 늦었고, 친구들과의 여행도 예약까지 다해놓고 막판에 빠졌다. 언제부턴가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바쁜지’ 이해받는 게 당연시됐다. 솔직히 말하면 높은 연봉만 아니면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 아니지만 회사에 있을수록 인생은 편해지더라. 언짢은 일이 생길 게 분명한 가족 모임, 친해지기보단 그저 아는 사람에 머물고 싶은 이들과의 자리 등 불편한 상황이나 관계를 피할 때 일등 핑계가 된다. 결혼 후엔 명절에 출장이 생기길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36세, 컨설턴트)CASE 3 생각대로 하면 되고 “막연히 생각했던 직업 이미지와 실제로 하는 일은 차이가 참 크다. 전문 PR우먼을 꿈꿨지만 전문적인 역량이 필요한 일보다 단순 반복 업무, 잡무가 훨씬 많다. 이러려고 그렇게 열심히 학점 관리하고 경력 만들고 입사 스터디까지 해가면서 회사에 들어왔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학습 효과 내지는 세뇌 교육이 정말 무서운 것 같다. 어느새 신입 후배들에게 회사 입장에서 얘기하고, 단순 작업을 기술직처럼 가르치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작업 과정을 통제할 수 있고, 예측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데서 쾌감마저 느낀다. 내 연봉과 상관 없이 집안 전체의 경제 사정이나 결혼 등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인생 변수들, 지지부진하고 엉망진창인 삶보다 회사 안에서의 삶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30세, 대기업 홍보팀)애증의 회사 앞, 세 갈래 길이 있다영국 정치경제학자 리처드 라야드(Richard Layard)는 저서 에서 ‘경제적인 성장이 이뤄진 반세기 후, 부의 증가에도 불가하고 사람들의 행복도는 1950년대와 비교해 나아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점점 더 쉽게 더 많이 실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어차피 불만족은 어느 곳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회사와 일은 도피처가 된다. 만족스럽지 않은 일상 대신, 불편한 사람들에 둘러싸이는 대신이다. 썩 아름답지만 않은 삶을 외면하거나 포장하는 도구로도 사용한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와의 불화가 있을 때도 문제는 관계 안에 있음에도 회사의 사소한 문제들을 화풀이 상대로 삼기 일쑤다. 결국 일이 싫고 회사가 싫어도, 이렇게 훌륭한 펀치 백도 없다. 우리는 회사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 일을 통해 자존감을 높인다.우리나라에 IMF가 닥쳤던 것도 벌써 10여 년 전이다. 하지만 당시 불었던 명예퇴직과 조기퇴직 문화는 지금도 우리 사회와 경제 조직들에 남아 있다. 경제는 내내 암울했고 기업들은 “더 젊게! 더 컴팩트하게!”로 체질을 바꿨다. 이는 개인의 커리어에 스피드를 내는 역할을 했고, 이른 성공이 키워드가 됐다. 여기저기서 “40대 이후엔 은퇴해서 여행을 즐기리라”고 다짐하는 젊은이들도 속속 목격된다. 하지만 지금은 평균 수명 80세 시대다. 이른 성공 후 쉬는 게 아니라 제2의 장래 희망을 찾아야 할 판이다. 결국 우리는 회사에 붙어 있을 운명이다. ‘뭘 해서 먹고살지’를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또 커리어 라이프 자체가 길어졌으므로. 자, 세 가지 옵션이 있다. 하나, 구관이 명관이라고 아무리 지지고 볶고 해도 역시 일터만한 곳이 없다는 걸 인정한다. 회사가 사회, 경제, 심리적으로 울타리가 돼주는 걸 생각하면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이렇게 냉정히 현실을 인식하고 나면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에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둘, 개인사업자가 된다. 경제력은 필요하고, 커리어 우먼으로도 남고 싶지만 조직 생활이 싫을 때 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사업의 성패와 직업 관리의 책임이 더 심한 두통을 유발할 수 있으니 경제 사정과 자신의 성향을 면밀히 고민해본 후에 행동에 옮길 것. 마지막은 마더 테레사 식의 가치를 추구하며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다. 거대한 소비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보다 더 높은 가치의 일들, 내 인생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면서. 커리어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지만 어차피 세상 모든 일들이 마음만 살짝 바꿔도 크게 달라진다. 일에 대한 불만이 머리를 찌르는 지금 이 순간이 ‘웰빙’과 ‘Have-It-All’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가장 적당한 시간일 수 있다.CHECK LIST커리어 코치 제임스 퍼링(James Fering)의 자가진단 리스트 . 이 중 3개 이상 해당되면 당신은 결코 회사를 옮기거나 그만둘 수 없다고.- 면접에서 거푸 미끄러지며 자괴감이 들 무렵 합격한 첫 직장.- “요즘 평생 직장이 어디 있냐”는 말에 공감하지만 속마음은 ‘ 지금 직장만큼 편한 곳이 어디 있냐’는 것,- 사내 어르신들의 예쁨을 독차지 하고 있거나 팀원들과 친목이 돈독해 주말이나 휴일에도 만나곤 한다.- 대형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거나 상사로부터 이번 승진 대상이라는 확실한 언질을 받았다.- 연봉이 확연히 높고 상여금과 보너스도 빼먹지 않으며 계열사 혹은 제휴사 문화·복지 혜택도 빵빵하다. - 예체능 혹은 전문 기술이 필요한 분야여서 어릴 때부터 이쪽만 팠다. - 현실적으로 이직 가능한 업계, 구체적인 회사별 조직구조, 문화, 연봉 체계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