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보는 내내 심장이 쪼그라들게 내달리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턱을 괴고 멍하니 스크린을 응시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 전자가 갖은 양념으로 요리한 뷔페식 만찬이라면 후자는 된장찌개에 잘 익은 묵은지, 그리고 구수한 보리차가 올려진 시골밥상이다. 배부른 만찬은 쉽게 포만감을 주지만 소화제 없인 넘길 수 없고, 시골 밥상은 무미건조 하지만 돌아서면 자꾸 생각 나는 맛이 있다. 동그란 밥상에 자기만의 찬을 내놓는 ‘짐 자무쉬’의 쿨하고 구수한 시골 식 3첩 반상.;;짐자무쉬,커피와담배,브로큰플라워,리미츠오브컨트롤,천국보다낯선,빌머레이,틸다스윈턴,데드맨,이삭드번콜,샤론스톤,엘르,엣진,elle.co.kr:: | ::

간단한 목 축임부터 중독의 또 다른 말은? 바로 ‘이번이 마지막’. 우리는 많은 것에 중독되어 있다. 인터넷 중독, 핸드폰 중독, 쇼핑 중독, 다이어트 중독.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빼 놓을 수 없는 카페인, 니코틴 중독까지. 다들 ‘이번이 마지막이야!’를 외치지만 정말 마지막 이길 바라는 사람은 잘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여기, 오히려 중독을 즐기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영화가 있다. 바로 . 짐 자무쉬는 끽해야 두 세명이 등장하는 옴니버스 에피소드에 커피와 담배판을 벌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뿌연 담배연기와 진한 커피향으로 가득한 이 영화엔 빵 터지는 웃음도, 가슴 절절한 사연도, 그렇다고 끝장나게 잘생긴 배우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커피 몇 잔 홀짝이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거나 말보로 담배를 태우며 어설프게 대화를 이어 가는게 전부다. 심지어 출연한 배우 모두가 왠지 2% 부족한 캐릭터라 도움의 손길 마저 주고 싶은 지경이다. 그럼 짐 자무쉬는 왜 하고 많은 중독아이템들 중에 커피와 담배를 선택한 것일까? 일단 커피는 술보다 가볍고 차보단 진하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가 있다. 술 못 마신다며 회식자리에서 슬그머니 꽁무니 빼는 사람은 봤어도 커피 못 마신다고 보온병 챙겨 들며 차 마시는 사람은 못 봤다. 그래서 영화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릴없이 노닥거리는 20대 청년부터, 늘씬한 미녀배우, 그리고 죽음을 앞둔 노인까지. 그들은 커피 테이블 앞에서 한없이 여유로워 지며 부드러워 진다. 그리고 금연을 외치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난 지금 담배를 피우는게 아니야”라며 개똥철학을 펼친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근데 또 말이 된다. 차를 우려내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커피와 단 몇 분이면 타고 마는 담배처럼 사람들의 만남도 단발적이고 쉽게 타올랐다 또 금방 사그라든다. 네모난 체스판 테이블에 마치 대칭을 이룬 것처럼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커피잔과 삐죽이 올라선 담배 한 개피가 어이없는 그들의 대화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니코틴과 카페인을 처음 접할 때 느낀 낯선 느낌과 텁텁함처럼 짐 자무쉬 영화는 한번에 끌리지는 않지만 묘하게 계속 맛보고 싶은 매력이 있다. 조용히 음미하기 중 10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빌 머레이가 주인공으로 나섰다. 감독과 각본을 함께 맡고 있는 짐 자무쉬는 항상 타겟을 설정해 두고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다. 그리고 의 타겟은 의 빌 머레이로 정했다. 영화 과 함께 시작되는 주인공 돈 존스턴의 ‘헤어진 옛 애인 찾아 삼만리’여정. 과거의 여자들 중 한 명에게서 ‘니 아이를 가졌었다. 그리고 19살이 된 그 아들이 조만간 널 찾아갈 것이다.’라는 원자 폭탄 못지 않은 폭격 편지를 받은 돈. 보통 영화라면 편지를 들고 호들갑 떨며 발신인을 추적하거나, 그 동안 받은 연애 편지를 모조리 꺼내 봉투 글씨와 대조하는 치밀함 정돈 보여야 하는데 그저 친구가 정해 준 루트를 따라 담담히 ‘옛 사랑’들을 찾아 나설 뿐이다. 과거 여인들의 ‘현재’ 모습은 다양했다. 아직도 혼자 살거나, 이제는 가정을 꾸렸거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거나. 누군가는 꼭 다시 찾아 오라며 돈을 반기고 누군가는 과거의 분풀이로 눈탱이 밤탱이 될 때까지 사정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그러는 중에도 항상 핑크 꽃다발을 들고 같은 표정으로 같은 차에서 내려 과거의 문을 두드리는 돈 존스턴. 그의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 지루함이 몰려온다. 천천히 느리게 과거를 되짚어 가는 남자. 근데 다음이 궁금하다. 그리고 여기에 핑크 편지로 시작된 짐 자무쉬의 귀여운 핑크 잔여물들이 그 호기심을 배가 시킨다. 과거 애인들 곳곳에 얼룩져 있는 핑크색들. 핑크 가운, 핑크 명함, 핑크 팬츠, 핑크 오토바이 심지어 핑크 타자기까지. 결국 가장 확신이 가는 네 번째 전 애인에게서 끝내주게 얻어 터지고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도 그는 여정 중 만난 ‘새로운 여자’들을 생각한다. 지독하게 웃긴다. 여자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 와중에 또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로 의심되는 세 명의 소년들과 스친 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돈은 영화의 시작처럼 또 멍하니 서있는다. 생기 없는 주인공의 눈빛을 욕하면서도 함께 여정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힘이 쭉 빠진다. 더 이상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들의 존재가 있기나 한 건지 그리고 지겹게 쫓아다닌 핑크색의 의미가 뭔지 궁금하지 않다. 그저 도로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는 저 늙은 남자를 보듬어 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생각했던 내 과거의 애인들에 대한 상념도 같이 지워버린다. 어차피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팔자니까. 꼭꼭 씹어드세요 “스페인어 못하죠, 그렇죠?” 단벌 신사 이삭드 번콜과 함께 시작되는 고독한 킬러의 여정은 보다 무겁고 보다 진하다. 작정하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에스프레소 두 잔과 성냥갑, 그리고 바이올린, 영화, 분자 등에 대해 열 올리며 주인공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사라지는 지령 전달자들. 전라에 대놓고 주인공을 유혹하는 여자가 등장할 때나 5분간 맹렬히 이어지는 탱고 씬 속에서도 냉철하고 무덤덤한 주인공 흑인 킬러. 장소를 계속 이동하며 옷을 바꿔 입고 지령 전달자들의 일장 연설을 들은 뒤 성냥갑 속에서 흰 쪽지를 빼내 맛있게 씹어 먹으며 에스프레소 한 잔 원 샷. 영화의 80%이상을 똑같은 장면으로 인물만 바꿔 등장시키는 은 이상의 같다. 제일의아해가,제이의아해가,제삼의아해가 겁도 없이 달리는 모습처럼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으로 마지막 땅! 하고 임무 완수 후 쿨하게 옷을 바꿔 입고 다시 제 갈 길 가는 이상한 남자. 극 중 틸다 스윈턴은 지령 전달을 하며 이런 대사를 한다. “가끔 영화의 그게 좋아요.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정말 아무 말 없이 노천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비둘기를 쳐다보는 이상한 남자의 시선이 지겹다가도 그가 바라보는 풍경이, 그가 듣는 소리가, 그가 달리고 있는 여정이 내 모습 같단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인생이란 아무 의미 없다고 외치지만 내가 보고 듣는 이 모든 것들이 순간, 순간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 것 인지. 그리고 그것은 느끼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무게로 돌아온다. 짐 자무쉬의 영화를 보고 나면 소리 없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다. 분명 절정은 없었는데 땅에 내딛는 순간 밀려오는 현실과의 괴리감과 허무함, 그리고 다시 한번 타보고 싶은 절박함까지. 고독하고 외로운,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지루하게 뱉어내는 일상이 싫지만 궁금하다. 그들은 뭘 좋아하고 무슨 일이 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자꾸만 알고 싶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과가 아닌 객관적 실체의 사과를 그리고 싶어했던 화가 폴 세잔과 닮았다. 색을 잃게 만드는 고전적 방식이나 빛으로 견고함을 해체시키는 인상주의 방식이 아닌 오직 대상만을 탐구하는 못 생긴 세잔의 사과처럼, 과장하거나 쪼개지 않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짐 자무쉬.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원색적으로 드러내 놓지도 꽁꽁 숨겨놓지도 않고 무신경하게 영화 이곳 저곳에 펼쳐 놓았기 때문에. 그러니 굳이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짐 자무쉬가 차린 밥상에서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저, 입맛 대로 골라 먹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