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권의 바캉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휴가철 가장 좋은 친구는 책이다. 질량, 분량, 함량을 고려해, 휴가지에서 읽기 적당한 책 세 권과 휴가를 반납하고 읽을 만한 책 세 권을 나누어 보았다. ::김연수, 김중혁, 김영하, 제임스 설터, 신형철, 로쟈, 데니스 루헤인, 서동진, 전영백, 낸시랭, 대책없이 해피엔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어젯밤, last night, light years, 운명의 날, 자유의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 바캉스, 휴가, 추천도서, 휴가철추천도서, 8월추천도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씨네북스, 문학동네, 마음산책, 황금가지, 돌베개, 궁리, 엘르, 엣진, elle.co.kr:: | ::김연수,김중혁,김영하,제임스 설터,신형철

LIGHT BOOKS 3 : 휴가지에서 읽기 좋은 책 1 영화에서 삶을 읽는다김연수?김중혁, , 씨네북스소설가들의 삶이 궁금하다. 팬이 스타에게 품는 감정처럼, 어딘가 다르길 기대하면서도 우리가 같은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싶다. 그럴 땐 소설 말고 그들의 에세이나 칼럼을 읽는다. 에세이는 소설보다 친근하다. ‘대꾸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2009년 영화지 에 연재한 ‘나의 친구 그의 영화’라는 칼럼을 묶은 것이다. 김연수와 김중혁은 초등학생 때부터 알아 온 동향 친구다. 김연수는 날카롭고 김중혁은 둔중하다.(생각해보니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하다.) 지근지근 쪼아대며 핑, 퐁, 탁구 경기하듯 주고 받는 솜씨를 보아 하면 역시 한 두 해 알아온 사이가 아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다. 연구하듯 작품을 분석하는 글은 시네필과 영화 평론가의 몫이다. 두 소설가는 분석하는 대신 공감을 자아낸다. 보통 사람들의 영화 관람법이 그러하듯, 이들의 칼럼은 영화를 벗어나 개인적 추억과 사회적 현실을 향한다. 둘의 사생활을 짐작하는 재미와 영화에 대한 공감, 그리고 2009년 모두가 감내해야 했던 생채기까지, 삶의 결을 짚어 낸 문장들을 보면서 웃고 슬퍼했으며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되새겼다. 2009년엔 유독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과 사물들이 사라졌다. 모두에게 고된 나날이 흘러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먹고, 자며 살아간다. 2009년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변했다. ‘내 시점을 타인과 공유할 때,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와 타인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최종적으로 구축됐다. … 기나긴 청춘이 이제야 끝났다.’(김연수), ‘혼자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나 또한 얼마나 조용한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생각했다’(김중혁) 등등의 문장을 읽고 문득 깨달았다. 표현의 세계에서 우리는 벙어리에 가깝다. 그래서 그들의 문장으로 화를 내고, 반성하고, 위로도 받는다. 마음의 속살을 꼬집는 문장은 곳곳에 널려 있다. 얼핏 교환 일기나 만담집 같은 이 책은 휴가를 위해 이동하는 교통편 안에서도 쉽게 읽힌다. 펼치는 쪽 어디라도 흥미롭지만 기억을 되짚으며 차근차근 넘기기를 권한다. 깨알 같은 재미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1년의 하루하루는 ‘모두가 다른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나날들을 살아오면서도 우리는 자신이 일생, 즉 하나의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저마다 다르고, 결국에는 모두 하나다.’(김연수)같은 대목을 맞닥뜨리면, 역시나 소설가는 참 대단한 존재라며 소녀 팬처럼 경건해지고야 말 것이다.2 김영하는 ‘지금’을 쓴다김영하, , 문학동네김영하는 안전한 작가다. 그가 쓴 소설은 재미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한국 문학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더라도 계절마다 책 몇 권이나마 읽는 사람이라면 김영하를 안다. ‘톡톡 튄다’는 90년대적 수식이 여지없이 잘 어울리는 표현들과 거무죽죽한 유머가 잘 버무려진 그의 글은 막힘 없이 읽힌다. 김영하의 새 단편집이 나왔다. 동료 소설가 박민규가 추천의 글에 썼듯 ‘그의 이름만으로 이미 소름이 돋았을 독자들이 널리고 널렸을’ 것이며, 김영하의 글이 재미있다고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건 ‘당연한 소릴 지껄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김영하는 ‘지금’을 쓴다. 새로운 방식과 소재를 금세 자기 식대로 소화해내는 포식자적 장난기에 감탄한다. 우리 반 우등생에게 전교 1등을 요구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여지없이 비판이 날아들지만,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워 평가하는 건 소설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 김영하에겐 가볍고 메마른, 김영하만의 방식이 있다. 지금까지 김영하가 쓴 소설들은 10여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두세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21세기 서울의 이야기도 충분히 보편적일 수 있다. 청탁 받지 않고 작가 본인이 내킬 때 쓴 글이어서인지, 이번 소설집은 조금 다른 인상을 준다. 에는 단편 소설 열 세편이 담겨 있다. 한 페이지를 간신히 넘기는 짤막한 글부터 50페이지에 달하는 글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가장 짧은 이야기는 ‘명예 살인’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를 연상시키는 피부과 간호사에 대한 글로,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을 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이번 단편집의 소설들은 마무리가 공허하다. ‘암전’(마코토), ‘…모든 것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조), ‘…박제 악어는 언제나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다’(악어)처럼, 마지막 문장은 모든 걸 깔끔히 정리하기보다 여운을 남겨 애매모호한 지점에 독자를 놓아둔다. 그래도 상념의 골짜기가 아득하진 않다. 김영하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재미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말이다. 옛날 TV에서 방영해주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를 떠올리면 적절할 것이다. 기묘한 구석이 있어서 더더욱 안 보고 배길 수 없다. 이전에 김영하의 책을 읽은 후 느꼈던 개운함은 덜하지만, 해석의 여지가 그만큼 늘어나 풍부해졌다. 기이하고 발랄한 이야기꾼의 재담을 듣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3 마지막 밤을 돌아보다제임스 설터, , 마음산책다른 책은 몰라도 제임스 설터의 은 직접 찾아낸 게 아니다. 평소 자주 들르는 유명 블로그에 올라와 있어 눈 여겨 봐 뒀다. 블로거 ‘로쟈’는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한다. 로쟈의 블로그에서 한 다리 더 건너 찾아 간 신형철의 칼럼에서는 퓰리처상 수상작가 리처드 포드의 말로 설터를 설명한다. “소설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제임스 설터가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사실은 일종의 신념과도 같다.” 명 편집자 조지프 폭스 역시 자신이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남을 책을 들어달라는 질문에 트루먼 카포티의 와 함께 설터의 을 꼽았다고 한다. 책을 읽기 전 책 날개와 뒷부분을 훑었는데 거기에도 온통 찬사 일색이다. 수전 손택과 하성란도 매력적인 글로 설터에 대한 마음을 드러냈으나, 그걸 옮겨 적어 분량을 채울 수는 없으니 생략하겠다. 아무튼 트루먼 카포티나 레이먼드 챈들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단한 작가의 책이 왜 이제야 번역된 것인지 의문이었다. 헤밍웨이의 영향으로, 보통 ‘위대한 미국 작가’로 꼽히는 이들의 문체는 하나같이 건조하다. ‘성경에 비견할 만한’ 책()을 쓴 코맥 매카시나 레이먼드 카버, 앞서 언급된 트루먼 카포티처럼 제임스 설터의 글 역시 물기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이야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건 섬세한 감정 묘사와 신선한 표현이다. 에 수록된 소설에서 감정은 묘사라기보다 서술이며, 표현은 신선하기보단 간결하다. 신형철이 칼럼에서 지적했던 것처럼(‘이 인상적인 책은 사건, 해석, 진실, 단절로 이어지는 저 과정을 놀랍도록 효율적인 방식으로, 짧고 깊게, 단숨에 성취해버린다.’ 링크 참조,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484.html) 설터의 소설 전개는 재빠르다. 간결한 문체와 빠른 전개가 만나면 짧은 분량에 집약적인 내용을 압축할 수 있다. 권투도 설터도 잘 모르지만, 설터의 방식이 무하마드 알리의 그 유명한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벌의 자리를 매나 독수리로 대체해야 더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 설터는 주요 인물들의 프로필을 한번 훑는다. 시시콜콜한 특이사항과 사건이 일어나는 인간 관계를 천천히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 성큼 핵심으로 들어가 있다. 독자가 그걸 인지할 즈음엔 코 앞에 또 한 발 성큼 결말이 다가온다. 소설가 하성란은 이 ‘당황스럽다’고 했다. 당황스럽다는 게 대체 무슨 얘긴가, 에디터야말로 하성란의 평이 당황스러웠지만 ‘성큼’과 당황스러움이 같은 맥락이리라 뒤늦게 짐작한다. 열 개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표제작인 이다. 화목하게 살던 중년 부부, 아내가 몹쓸 병에 걸려 고통에 시달리다가 의사와 합의 하에 안락사용 약물을 얻는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사를 놓는 일을 맡기로 했다. 워낙 막중한 일이라 혼자 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함께 할 사람 하나를 더 구한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부부 모두와 아는 스물 아홉 여자다. 마지막 만찬을 마친 뒤 남편은 아내에게 주사를 놓는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 다음부터다. 대단한 반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헛헛해진다. 의 원제목은 이다. 영어 ‘Last’에는 어제 말고도 마지막이라는 뜻이 있으니 어젯밤과 마지막 밤의 중의적 표현으로 해석 할 수도 있겠다고 누군가 썼던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그렇다. 어제든 그제든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이 마지막이다.HEAVY BOOKS 3 : 휴가 가는 대신 읽을 만한 책1 역사는 장르를 초월한다데니스 루헤인, , 황금가지세상에는 가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있다. 닉 혼비가 를 보고 한 말이 그랬다. "이 소설이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인줄 알았으면 안 봤을 거다"라고 썼다. 물론 시리즈로 나오는 주인공들을 싫어한다는 의미에서 퍼부은 악담이었다. 사실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예외라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었을 거다. 어쩌면 타고난 글쟁이 닉 혼비조차 질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켄지는 쉽게 잊어도 데니스 루헤인이라는 이름은 결코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5편의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가볍게 통과한다고 해도, 루헤인의 와 가 기다리고 있다. 이스트우드와 스콜세지가 이 소설을 각각 영화로 만들기 위해 직접 나섰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를 마음껏 꼬집으면서도 차가운 유머를 툭툭 던지는 그의 문장이 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루헤인은 2000년대의 레이먼드 챈들러라 불릴 만한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작가다. 더욱이 하드보일드한 느와르 소설의 기운에 깊은 문화적 취향(미국 문화에 대한 독특한 향수)이 어우러져 있다. 비애감이 낙엽처럼 휘날리는 단편 (단편집 )에 이르면, 그가 앞으로 어떤 세상을 꿈꿀지 너무나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을 바로 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역사소설은 루헤인 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헤인은 다양한 장르를 비빔밥처럼 정성스럽게 섞은 후, 미국의 혼란기였던 1910년대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소설을 이끄는 두 축은 야구를 사랑하는 흑인 루터와 보스턴의 잘 나가는 경찰 대니다. 두 사람이 겪는 사건이나 만나는 인물들을 경유해 제1차 세계대전 끝무렵의 미국 사회를 그리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으로 미국 내에서 급진주의자에 대한 경계가 극에 달해 있는 시기다. 수천 만 명의 희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공포로 다가오는 동시에, 몰락했던 KKK단이 흑인 인권운동에 반발하면서 부활했다. 그 결과 붉은 여름으로 불리는 인종폭동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또한 참전 군인들이 돌아오며 실업자들이 대거 양산되고 치솟은 생계비 때문에 각 영역에서 노동 파업이 벌어졌다. 게다가 금주법 시행으로 여기저기서 불만이 넘쳐났다. 이 모든 사건을 '미국사'라는 거대한 깔대기 안에 한꺼번에 모은 은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의 충격을 집중으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역사소설의 한계를 넘어서는 괴력과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시종일관 급변하는 사건으로 압도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꿈틀거리는 욕망(혹은 악)의 근원을 좇는 법을 잊지 않고 있다. 제3자조차 알고 있는 미국의 역사지만, 루헤인의 글 속에서는 새롭게 현재진행형으로 피어나고 있다. 루터가 애처롭게 살인자가 되고, 어딘가 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니가 경찰의 스파이로 나서는 과정으로만 500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루터와 대니의 만남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400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그러나 한 순간도 지루함이 없다. 침을 바를 시간도 아까울 정도다. 베이브 루스는 물론이고 유진 오닐, 존 리드 같은 문화적 아이콘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틀 동안 과 함께 한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보스턴에 다녀온 기분이 들 거다. 보스턴 행 티켓을 저렴한 가격 26,000원(2권)에 구입할 수 있다.2 더이상 자유는 없다서동진, , 돌베개자기 계발 서적이 싫다. 젖살이 아직 빠지지도 않은 아이돌 가수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며 유명 자기 계발 서적을 꼽았다. 괜히 속이 뒤틀렸다. 남의 취향에 왜 왈가왈부 하냐고 묻는다면 단숨에 기 죽일 이유를 갖다 대진 못하겠다. 자기 계발 서적의 함량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몇 년째 베스트셀러 목록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자기계발서 열풍을 보면 이 사회가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진 느낌이 든다. 긍정적으로 사는 건 좋은 일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적당히 행복하고 참을 만큼 불운할 텐데, 그것을 다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역량을 키워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행복과 불행은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때로 사회 구조는 개인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는 불행(불평등)을 양산하지만, 이 시대의 자기계발 열풍은 사회가 책임 져야 할 일들까지 개인의 몫으로 돌려버린다. 마땅히 주어져야 할 삶의 최소한을 얻기 위해 도태되지 않으려 몸부림 치는 게 마냥 긍정적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엄격한 이들은 타인에게 더더욱 엄격하다. 무리에서 도태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차디차다. 자신도 한 번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의 만족을 향하지 않는 계발은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버릇처럼 되뇌는 계발 이전에, ‘자기’에 대해선 얼마나 생각해 본 것일까? 되바라진 20대라면 자기 계발서에 대한 불만을 한 번쯤 토로해 봤을 것이다. 막연한 의문과 적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한 발 더 나가는 게 지식인이 할 일이다. 서동진 교수는 에서 ‘자기계발’의 의미를 확장했다. ‘자기계발의 문화란 새로운 문화산업이자 대중문화’ 인 동시에 ‘일터에서 새로운 노동주체를 형성하고 관리하는 주체화의 권력과 담론’ 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계발 문화는 학교, 지역, 정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데, 국가적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던 정책이 ‘경제개발계획’에서 ‘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으로 대체된다. 이 담론 안에서의 주체가 ‘자기계발하는 시민’, 곧 자신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개인이다.(p.32) 자율과 책임에 대한 압박은 ‘삶 밖의 세계에 어떤 허튼 소리도 하지 말라는 위협적인 목소리’와 ‘절망과 분노는 내색조차 하지 말라는 협박’을 내포한다. ‘이런 세계에서 내가 겪는 고통을 발설하는 방식은, 흔히 듣듯이 상처를 받았다는 식의 푸념이다. 거기에는 항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p. 9) 서동진은 자기계발 문화가 점차 증가해 온 것에 대해 정의하고 분석했으며, 자기계발 문화를 생산?소비하는 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담론에 대해 말한다. 그러기 위해 인재론과 전략경영, 인적 자원 관리, 역량 등 경제 개념에 대한 고찰이 필요했다. 책은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 ‘자기계발하는 시민’, ‘유연한 노동주체’, ‘자기계발의 의지’,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보기 편하게 분류되어 있어도 본래 논문이었던 것을 책으로 묶어 냈기 때문에 만만히 봐선 안 된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학자들이 무더기로 등장하는 몇 페이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겨야 했다. 이름만 들어봤거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학자들의 논점을 숙지한 다음에야 오독을 피할 수 있겠지만, 어려운 부분은 후일을 기약하고서라도 우선 읽어 두는 게 좋겠다. 똑 같은 말을 어렵게 하는 기술이 있는 게 아닐까 괜한 분통이 터질 무렵, 인터넷 블로거의 우스갯소리와 전문가들의 저서 인용, 표 등을 곳곳에 배치해 이해를 돕는다. 모르는 부분을 넘겨 가며 한 번 읽고, 필요한 텍스트를 이해한 다음 새로 정독하면 의미가 보다 명료해질 것이다. 서동진의 예전 인터뷰를 빌려 한 줄로 요약하자면, 는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본이 원하는 맞춤 인간형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노력하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이 책, 좀 아프다. 3 예술을 붙들다전영백 외, , 궁리지금은 예능인 비슷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한때 낸시랭이 미술계의 화두였던 적이 있었다. ‘큐티, 섹시, 키티, 낸시, 야옹’을 구호처럼 신나게 외치고 다니는 이 여자는 확실히 흥미로운 사람이긴 하다. 그런데 로봇 그림에 명품을 콜라주하고 비엔날레에서 비키니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은 과연 예술일까? 그리고 낸시랭은 스스로가 자부하듯 예술가인가? 학부 시절, 미술 교양 과목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낸시랭이 예술가가 아니라고 못박았다. 그녀가 예술이랍시고 하고 있는 것들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팝아트와 행위예술의 답습이기 때문이란다. 반대편에선 성격이 좋다는 둥 이상한 이유를 들어 낸시랭을 옹호했으나, 그건 인간 낸시랭을 위한 변명일 뿐 낸시랭의 예술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낸시랭의 예술가 여부야 기연가미연가 싶었지만 예술계에서 ‘예술’의 평가 기준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그 때 배웠다. 예술은 새롭거나, 적어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새로움을 구하려거든 새롭지 않은 게 무엇인지부터 알고 있어야겠다. (이후 )는 사실 비전공자보다는 전공자를 위해, 한국 현대미술 내부의 소통을 겨냥해 만들어진 책이다. 예전에 새로웠지만 지금은 새롭지 않은 것, 현대미술의 역사와 시대적 흐름에 대해 알고 거기에 ‘한국적 미학’에 대한 고찰까지 더했다. 예술학과 전영백 교수가 2009년 봄 대학원 [현대미술사]수업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박사과정 학생들이 논문을 집필했으며 석사과정 학생들은 70년대부터 각 시대의 대표 예술가 5~6명씩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는 논문과 인터뷰를 조합해, 논문?비평과 인터뷰를 따로 취급했던 기존 책들의 부족한 점을 메웠다. 이렇게 설명하면 갑갑한 전공 서적 같지만(두께도 얼추 맞먹는다) 미술에 관심 있는 보통 사람들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는 스물 두 명의 작가 사진과 각 작가마다 작품사진 다섯 컷씩 시원스러운 크기로 들어가 있어, 두고두고 소장하기 좋겠다. 논문은 각 시대별 쟁점을 말끔히 정돈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작가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는 재미가 퍽 괜찮다. 짧게 겉핥기 문답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2~3번씩 찾아가 인터뷰 했다.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질문이 있었다. 작가들에게 ‘한국성’에 대해 물은 것이다. 어떤 작가는 ‘문화적 뿌리 없는 개인적 독창성은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역으로 ‘독창적 개인은 문화적 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에 보다 찬성한다. 한국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다 보면 독자적 뉘앙스는 붕괴되고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에 빠질까 저어 되기 때문이다. 비루하나마 남의 의견에 숟가락이라도 얹을 수 있게 된 것은 다 낸시랭 덕분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술이 무엇인가’(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해 처음 의문을 품었던 것이 낸시랭을 봤을 때였다. 예술 여부를 가릴 만한 지위가 부여된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넘기다가 나중엔 자체적인 심미안을 얻길 바라게 되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든 낸시랭이든, 대체 무엇을 예술이라 하며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지 막연히 궁금했던 이에게 현대 미술의 실례를 들어 줄 교본으로 를 추천한다. 일단 발을 떼면, 전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두께와 22명이라는 숫자에 더럭 겁 먹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