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쇼 정말 좋았어요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쇼가 막 끝났습니다. 팡팡 터지는 플래시 세례와는 달리 디자이너들의 마음은 지금부터 타들어갑니다. “정말 좋았어요” 혹은 “수고하셨어요”.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쇼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지요.::강진영,윤한희,컬렉션,무대,패션쇼,런칭쇼,엘르,엣진,elle.co.kr:: | ::강진영,윤한희,컬렉션,무대,패션쇼

디자이너에게 6개월마다 한 번씩 열리는 패션쇼는 운명이자 굴레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기쁨이자 자랑이자 눈물을 의미합니다. 그 중 패션쇼가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시작한 시즌 컬렉션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세상과 교류하지 못해도 안 되고, 또는 너무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이어서 자칫 지루해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비현실, 창의성과 상업성, 매출과 이미지. 양쪽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운명은 참으로 가혹합니다. 짧은 시간, 그것도 단 10분간의 쇼를 준비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6개월 동안 들이는 노력과 고통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입니다. 하지만 쇼가 끝난 백스테이지에서 “이번 쇼 정말 좋았어요!”라는 찬사를 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강진영(이하 K) 패션쇼가 별로 좋지 않았을 때 우리가 들었던 표현은 뭐였을까? 윤한희(이하 Y) 수고하셨어요! K 듣고 보니 그러네. Y 영향력 있는 매체의 에디터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쇼의 디테일한 취재를 위해 쇼 시작 전에 백 스테이지로 찾아와 걸려져 있는 의상들을 조목조목 살피고, 컨셉트를 묻고, 촬영해 가잖아. 늘 그때가 제일 떨렸던 것 같아. 그 시즌 컬렉션의 첫 크리틱을 듣는 그때 말야. K 그래. 그 에디터의 표현이 “Really really amazing”이나 “G~re~at!” 또는 “This is the best collection of my life.”라고 표현하느냐, 아쉽게도 “Wonderful!” 또는 “수고하셨어요!”로 번역될 수 있는 “Good job!”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시즌 쇼의 성패가 충분히 가늠이 되곤 했어. Y 맞아. 그러고 보니 우리도 다른 디자이너 쇼를 보고 나서 백스테이지로 들어가 얘기할 때, 잘한 쇼는 “정말 좋았어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수고 하셨어요!”로 표현하는 거랑 같아. K 응. 그런데 왜 디자이너들이 “수고하셨어요!”로 끝나는 쇼를 할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해 보면 너무 다양한 이유가 있을 거 같아. Y 그래. 갑자기 헬무트 랭과 패션쇼 시간이 가까워 망쳤던 쇼가 생각난다. 그때는 특히 헬무트 랭이 프라다 그룹에 편입된 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긴 뒤 뉴욕 컬렉션에서 가장 뜨거운 쇼 중 하나가 됐을 때입니다. 헬무트 랭 특유의 간결하지만 우아한 라인과 아방가르드한 이미지는 뉴욕 컬렉션에서는 보기 힘든 쇼였으니 모든 패션 관계자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요. 당시 Y&Kei 소호 매장 바로 맞은편이 헬무트 랭 사무실이었습니다. 쇼 전날인 새벽 2시경에 쇼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나왔을 때였습니다. 에그머니나. 맞은편 헬무트랭 사무실은 한마디로 대낮같이 환한데다가 사람들까지 몰려서 북새통이었습니다. 헬무트 랭은 그 시간까지도 모델 캐스팅을 끝내지 않고 계속 오디션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탄 남자 모델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사무실 안은 남녀 모델들이 캐스팅이나 피팅을 위해 대기 중이었으며, 길에는 오디션을 기다리는 모델 20여 명이 담배를 피우거나 맥주를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 있었습니다. K 좋은 쇼를 하려면 무대, 음악, 조명 전부 좋아야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좋은 모델을 기용하는 거잖아. Y 쿨하고 시크한 빅 모델들을 헬무트 랭이 대거 기용하는 바람에 그 다음 시간에 쇼를 하는 우리는 모델 선택의 폭이 좁아 애를 먹었지. 하지만 더욱 놀라웠던 건 디자이너 헬무트 랭의 완벽주의였어. K 그래. 다음날이 패션쇼인데도 밤새 모델 오디션을 보는 그 집요함과 완벽함이란. Y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니, 헬무트 랭이 뉴욕에 도착한 뒤 모델 부커나 스태프들이 준비해놓은 쇼 콘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했다나 봐. K 역시 톱 디자이너는 달라. 헬무트 랭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 역시 그날밤을 뒤척인 채 다음날 쇼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쇼 시작 전까지 당시 중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던 모델 킴 피어스가 끝내 나타나지 않아 우리의 얼굴은 사색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모델 부커 캐서린이 연락해 이유를 알아보니 전날 밤 헬무트 랭 쇼에 뒤늦게 캐스팅돼 우리 쇼에 못 온다는 거였습니다. “으악!!! 어떻게 쇼 시작 전에 모델이 못 온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이런 일은 언제나 있는 일로 쇼를 끝내고 에이전트를 상대로 소송하면 된다는 어이없는 대답에 우리는 다시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Y 아휴.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해. 우리 걱정은 킴이 입기로 한 두 벌의 옷을 어떻게 할 것인지였어. 시간이 가능한 모델을 데려오자 한 벌만 입는 모델 중에서 골라보자 등등. 결국 여러 명의 모델에게 옷을 입혀본 뒤 모델 순서까지 바꿨지. 결과적으로 한 벌은 순서가 가능한 모델에게 입혀졌고, 또 다른 한 벌은 아예 쇼에 못 나가게 됐어. K 모델들은 어떻고. 피팅했을 때와 달라진 옷을 어떻게 입는지 몰라 당황했지. Y 결국 모델 이름과 맞춰놓은 룩이 바뀌어서 쇼 프로그램도 엉망이 됐고, 게다가 쇼 콘티도 순서가 맞지 않아 옷과 음악이 따로 놀았잖아. 완성도는 고사하고 평균 수준에도 못미치는 컬렉션으로 보여졌을 거야. 당연히 쇼가 끝난 뒤 백스테이지에는 관계자들의 “수고하셨어요!”라는 평가가 울려 퍼졌을 테고.K 그러게. 으윽. Y 그 다음 시즌부터 우리는 헬무트 랭 옷은 절대 안 사 입는 소심한 복수로 대신했지. Dear 패션 쇼장의 관계자와 관객 여러분, 디자이너 누군가의 쇼장에서 여러분의 눈을 의심하게 되는 어설픔이나 실수를 발견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사정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너그러운 이해를 당부드립니다. 때로는 옷과 음악이 따로 놀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은 모델이 옷을 입고 나오고, 가끔 예기치 못한 실수와 해프닝도 있을 것입니다. 아! 사실 그 시즌의 쇼의 결과는 누구보다 디자이너가 먼저 알고 있답니다. 모델 피팅을 하면서, 출연 모델들의 라인업을 완성하면서, 쇼의 콘티를 완성하면서, 쇼 시작 전 음악, 무대, 조명 관련 최종 리허설을 하면서, 쇼 시작 전 먼저 듣게 되는 백스테이지의 크리틱을 들으면서,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직감적으로 쇼의 성패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따끔한 지적보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따뜻한 위로가 그리울 때가 있으니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는 컬렉션의 결과가 탐탁치 않게 느껴지시더라도 “수고했어요”라는 표현이 아닌 다른 말을 준비해주세요. 이 글을 읽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여러분이 건네는 다정한 인사 “수고했어요!”가 결코 “정말 좋았어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알기 때문이죠.*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7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