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이의 부암일기' #2 도심 속 작은 숲, 백사실 계곡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내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마법 같은 공간, 백사실 계곡 | 김소이,부암일기,김소이 부암일기,부암동,백사실계곡

부암동은 먼 옛날 오성과 한음이 뛰어놀며 우정을 나눈 동네이다.    어릴 적 책 속에서 읽었던 일화의 주인공들이 이곳에 살았다니! 그 유명한 감나무가 있던 오성의 집은 어디쯤 있었을까, 오성을 놀리던 한음의 집은 이쯤에 있었으려나 상상하며 동네를 산책하고는 한다. 남다른 해학과 기지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그들은 개그 6주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웃겨보려고 다분히 노력한 나에게 위인 중의 위인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위트있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그런 기지를 발휘하는 여유가 생긴 것일까?   오성이 어른이 되어 별장을 지었다는 백사실 계곡을 처음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을 먹기까지 쉽지 않았다. 백사실 계곡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는데 우리 집에서 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을 두 번이나 거쳐야 하는 난이도 최상의 코스다. 말이 언덕이지 체력이 숨 쉬는 것만으로 동나는 나에게 '시시포스'가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했던 산과 같은 존재이다. 실제로 여러 번 시도했다가 남의 집 앞 계단 앞에 쓰러져 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모기 만한 목소리로 살려주세요. 를 외친 적이 많다. 다른 길로 갈 수 있었고 바이크를 탈 수도 있었지만, 반드시 나를 쓰러뜨린 이 길로 백사실 계곡에 다다르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그날은 이른 봄날이었다. 전쟁을 앞두고 군인이 총을 장전하듯 핸드폰 속 플레이리스트에 좋아하는 곡들을 가득 담고 길을 나섰다.   세 번째 곡이 끝날 때 즈음 (장기하와 얼굴들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공포의 언덕을 넘어 또 다른 공포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이러다 죽겠다, 오성의 집은 우리 집 근처는 아니었나보다, 이 길을 어떻게 매일 올랐나 말도 안 된다, 온갖 생각들로 뇌가 멈춰버릴 것 같을 때 드디어 백사실 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집 담장 옆으로 내어진 길을 조금 걸었을까,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절경이 앞에 펼쳐졌다. 도시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숲속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즐겨 읽던 책 중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는데,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지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했다. 내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원더랜드로 들어서는 그 마법 같은 순간. 모든 게 낯설지만 아름답고, 두렵지만 궁금해지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은 어떨까?      부암동으로 이사 온 뒤 4개월 만에 찾은 백사실 계곡에서 그 답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내어진 길을 따라 한참을 가보니 오성의 별서가 있던 터가 나왔다. 우물과 함께 저 위에 사랑채의 흔적도 보였다. 터의 초석에 앉아 오성이 어른이 되어 친구들과 시를 읊고 글을 쓰고 해학을 나누었을 이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무들 틈 사이로 수줍게 내리쬐는 햇볕과 새들의 쉴 새 없는 지저귐, 귓등을 간지럽히는 물소리와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오성과 한음의 특유의 여유는 자연에서 비롯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매일 뛰어놀며 접했던 이 신비로운 곳에서 유년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았을까. 견고한 그들만의 세계가 있으므로 그런 기개와 여유를 얻은 것이 아닐까. 기개와 여유에서 시작되는 위트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다.   서로의 농담과 장난을 좋아해 주고 더 나아가 결정과 행보를 지지해주었던 오래전 두 친구의 놀이터에 머물다 보니 문득 나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우리 역시 서로의 웃긴 모습과 가끔은 이상한 모습을 누구보다도 재밌어하며 '다른 사람은 못 놀려도 우리는 놀린다.'라는 마음으로 마음껏 웃어준다. '네가 제일 이상해', 라는 말을 농담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그런 너의 다른 점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그것이 너를 이루는 색깔이다.'라는 인정이 깊고 두껍게 깔려있다. 나의 농담에 웃어주고 더 나아가 그 농담을 완성 시켜주는 친구들. 그들과 언젠가 꼭 백사실 계곡에 놀러 오고 싶어졌다. 물론 꼭 가파른 언덕 두 개를 올라야 하는 길로 말이다.   기대하라, 나의 오성과 한음들.   '김소이의 부암일기'는 매월 넷째 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김소이의 부암일기 #1화는 이곳을 클릭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