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으로 들어온 주한 스위스 대사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회색 아파트 숲에서 유일하게 옛 풍경을 복기하는 이 건축물의 정체는 주한 스위스 대사관이다. | 대사관,스위스,스위스대사관,선임 건축사,구한말 한옥

  주한 스위스 대사관의 접객 공간. 바깥을 품는 창이 곳곳에 나 있다. 광장이 된 마당. 사람들을 한데 모으며 각기 다른 공간을 연결한다. 사무 공간. 지붕의 뼈대를 만드는 서까래가 공간의 모티프를 명확히 보여준다. 건축가 니콜라 보셰. 주한 스위스 대사관이 자리 잡은 종로구 송월동은 ‘돈의문 뉴타운 제1구역’으로 불리는 교남동과 바짝 붙은 동네다. 돈의문 북쪽 성곽 아래, 교남동은 구한말 한옥과 작은 동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였다. 서울시가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이름 붙인 종로 재개발 프로젝트가 시행된 결과, 14만m2 부지에 있던 저층 주택과 건물이 있던 자리엔 강북 부동산 신고가를 경신 중인 2500여 세대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1974년부터 이 터를 지킨 주한 스위스 대사관이 공간 부족과 건물 낙후 문제로 이전 대신 새 건축물을 짓기로 결정했을 땐 ‘돈의문 뉴타운 사업’이 낳은 고층 아파트가 없었다. 버크하르트 파트너스 스위스 로잔 건축사무소의 선임 건축사 니콜라 보셰(Nicolas Vaucher)는 새 스위스 공관 설계에 ‘한옥’이라는 건축 언어를 선택한 이유로 대사관을 둘러싼 자연, 지역성과의 조화를 들었다. “대사관이 처음 들어선 1974년 이후 이곳의 주변 환경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주변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건축물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답을 ‘한옥’에서 찾았습니다.”     마천루의 첨예한 대조 덕에 교남동과 송월동의 경계에 자리 잡은 주한 스위스 대사관을 찾는 일은 쉽다. 신분과 용건 확인이란 입장 절차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화강암으로 장식된 넓고 환한 마당이 가장 먼저 방문자를 반긴다. 광장처럼 펼쳐진 이 안마당은 주한 스위스 대사관의 핵심 공간이다. 니콜라 보셰는 중심부를 비움으로써 각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공간이 스스로 소통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터를 채우는 정원 대신 빈 마당을 채택했다고 설명한다. “한옥에서 앞마당은 각각의 역할을 가진 공간을 하나로 잇는 구심점입니다. 이 구조를 대사관으로 옮겨보자는 생각으로 관저와 관광청, 사무 공간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공간을 한 지붕 아래에 두고, 각 공간이 마당을 통해 연결되도록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결과 이 공터는 건물의 안과 밖을 매끄럽게 잇는 통로이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하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뜰 안에서 눈에 띄는 유일한 구조물은 스위스 출신 예술가 예나 마리아 튀링의 설치미술 작품 ‘워터 커넥션’이다. 음각으로 길게 뻗은 이 수로는 서울의 한강을 형상화한 작품이자 ‘집수 시설’이라는 기능도 담당한다. 빗물이 지붕 처마에서 레인 체인을 거쳐 물받이에 저장되는 원리로, 친환경 전략을 중요시하는 스위스 건축 문화의 특색을 반영한 요소다.     마당을 비롯해 대들보와 격자 창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나선형의 건물 구조가 주한 스위스 대사관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한옥의 요소라면, 주요 건축재로 사용된 ‘목재’는 건축가가 한국과 스위스 건축 사이에서 찾은 접점이다. “스위스 건축물이 갖는 공통점은 소재에 있습니다. 바로 ‘목재’를 쓴다는 점이죠. 숲과 산이 많은 스위스의 지형적 특색이 반영된 이 건축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스위스 건축의 핵심 요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 건축 역시 나무가 주요 건축재로, 산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한국의 현대 건축에선 더 이상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 작업을 통해 한국인에게 ‘나무로 지은 건축’이라는 옛 전통을 상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자연, 환경과의 유기적 관계는 주한 스위스 대사관에 반영된 한옥의 핵심 철학이자 지향이다. 니콜라 보셰는 대사관을 둘러싼 초고층 주거단지, 근린공원 등과의 자연스러운 연결이라는 과제의 답을 ‘중첩’에서 찾았다. “한옥엔 공간의 켜가 많아요. 제가 본 한옥의 고유함은 앞마당에서 방을 지나면 또 다른 방이 나오고, 그 건너에 뒷마당, 담 너머 다른 채가 있는 구조입니다. 이를 ‘중첩’이라고 하는데, 안방에서 문을 열면 수많은 풍경이 ‘문’이라는 액자 속에 겹겹이 담기는 이유죠. 대사관의 관저와 사무 공간, 다목적실 곳곳에 난 높은 창과 통창, 유리 타일 벽 등은 이 공간에 빛을 들이는 동시에 건물의 안과 밖을 열린 구조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한옥의 복구나 재현에 머물지 않는 작품이 된 비결은 현대성을 반영한 건축의 재해석과 스위스의 정신에 있다. “건물을 지을 때 다양한 소재와 형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완벽한 마무리’입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거나 급하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선 누구나 타협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좋은 건축물은 세부까지 완벽해야 합니다. 이곳에 들어와 건물을 찬찬히 뜯어보면 격자 창살의 일정한 간격, 담장과 하나처럼 이어지는 지붕의 선, 서로 다른 목재의 완벽한 결합 같은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우리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건축은 소통의 도구이자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니콜라 보셰는 주한 스위스 대사관이 “스위스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든다”는 문장 그 자체가 구현된 예술 작품이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이 ‘메이드 인 스위스’에 기대하는 것, 즉 탁월한 건축물이란 바로 이런 공간입니다. 이 퀄리티가 곧 스위스의 정체성이자 두 나라를 긴밀하게 묶어주는 원동력입니다.”   대사관의 의뢰를 받은 네덜란드 사진가 헬렌 반 미네가 찍은 전경 중 한 컷이다. ⓒHelene Binet 주한 스위스 대사관은 ‘PUSHING THE LIMITS-Celebrating Swiss Excellence & Innovation in Korea’라는 슬로건 아래 2019년 한 해 동안 대사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를 선보일 예정이다. 먼저 오는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취리히, 서울과 만나다’ 축제가 서울에서 열린다. 그 밖에 건축, 디자인, 도시계획, 시각 및 공연예술 등의 주제로 스위스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문화 인프라와 성과를 소개할 계획이다. www.eda.admin.ch/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