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민수의 드라마처럼 사는 법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반칙 한번 안하고 승리하기에 인생이라는 링은 결코 만만치 않다. ‘상식 이하’의 선량함을 강요하는 드라마는 그래서 때때로 이율배반적이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인생은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드라마가 인생이고 인생이 드라마인 사람이 있다. 놀랍게도 그는 언제나 승리한다. :: 드라마틱한, 놀라운, 승리한, 엘르,엘라서울,엣진,elle.co.kr :: | :: 드라마틱한,놀라운,승리한,엘르,엘라서울

프롤로그“안경 쓴 얼굴은 감각의 각도가 섬세하고 예리하지만, 입을 열면 ‘상식 이하’의 선량한 촌놈 기질이 훌렁훌렁 배어나온다. 그는 물론 예리했지만, 예리한 바로 그만큼 따스하고, 말투는 거의, 오래됐지만 여전히 상큼한 애인처럼 깨끗하고 자상했다.” 시인 김정환이 오래전 그를 인터뷰한 글 중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그의 짧은 인상을 대신 표현하고자 한다. 촌놈 운운 하며 그가 가진 ‘상식 이하의 선량함’을 묘사하기엔 에디터의 살아온 날이 너무 일천한 까닭이다. 예의 그 푼푼한 미소로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스태프들에게 반가움의 인사를 건넸다. 서울깍쟁이 같은 외모와는 달리 입에서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왔다. 시인의 글은 무려 8년 전 것이었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선량한 촌놈 기질이 훌렁훌렁 배어나오는 듯했다. 그럼에도 안경 너머의 눈빛은 꽤나 예리한 것이어서 약간 사람을 긴장시키는 면이 있었다. 만만하지만 만만치 않은 남자. 표민수 PD에 대한 이야기다. 그땐 참 무슨 깡이었는지(1998)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노희경이 썼고, 표민수가 그렸다. 오래전 작품이지만 표민수 PD를 말하려면 노희경 작가와의 콤비 플레이를 빼놓을 수 없고, 그러자면 우선 이 드라마를 언급해야 한다. 은 표민수-노희경 콤비의 첫 번째 장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연하의 유부남과 직장 선배 간의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그냥 ‘불륜 드라마’다. 이 작품은 방영 당시 불륜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지만 동시에 ‘ 신드롬’을 일으키며 수많은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가슴 절절한 대사와 뛰어난 영상미로 통속적인 주제를 사려 깊게 풀어낸 이 작품은 타성에 젖어 있던 PD와 작가들에게 일격을 가했고, 안방극장에 표민수 PD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이 드라마를 기념하는 동호회가 있으며, 회원들끼리 10년 넘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드라마의 대본집이 뒤늦게 출간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나 정도쯤 되는, ‘폐인 양성 드라마’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그땐 정말 둘 다 무슨 깡이었는지…(웃음). 처음 맡은 미니 시리즈라 의욕이 대단했지요. ‘설마 방송국에서 자르기야 하겠어?’ 하면서 힘껏 밀어붙였던 것 같아요. 노희경 작가도 한창 힘이 넘쳐나던 때라 직접적으로 폐부를 찌르는 대사가 많았고요. 불륜 드라마라는 비난도 있었는데, 당시 한 기자분이 첨예하게 물어 오시기에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궤변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저는 ‘아니 불’ 자에 ‘윤리 윤’ 자, 즉 ‘윤리가 아닌 것’이 불륜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불륜이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불륜이 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요.” 노희경 작가와의 첫 만남은 대략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악으로 깡으로 삶을 버텨내던 서른 즈음, 배우 나문희의 소개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그날 앉은 자리에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무려 7시간 동안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누가 더 가난한 시절을 보냈는지 경쟁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에 대한 탐색전을 마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작품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고, ‘당신이라면’으로 시작되는 질문과 ‘왜’라는 반문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랑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계속해서 사랑을 갈구하는가?’ 따위의 원초적인 의문은 가난의 기억과 맞물려 소외된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이어졌고, 에이즈, 동성애, 불륜 등 예민한 소재들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그중 ‘부부 사이에 한명이 에이즈 환자일 때 과연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라는 표민수 PD의 묵직한 물음은 그대로 대본 하나가 되어 에이즈 환자의 사랑을 그린 (1998)이라는 단막극을 탄생시켰다. 이후 남자들 간의 동성애를 다룬 (1999),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을 그린 (2000), 40대 미혼모와 20대 부하직원의 사랑을 담은 (2002)을 발표하며 두 사람은 마이너리티 감성을 대표하는 방송가의 황금콤비로 자리매김했다. 노희경 작가가 훗날 회고하듯 ‘참 잘 끼운 첫 단추’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작품의 시청률은 늘 저조했다. 심지어 은 첫 회 방영에 1.8퍼센트라는 사상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대중은 TV 앞에서 진실보다 환상을 원했고 불편함보다는 달콤함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이 고집 센 콤비는 좀처럼 에둘러가는 법이 없었고, 덕분에 만드는 작품마다 족족 ‘마니아 드라마’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게 참 희한해요. 저희 둘만 만났다 하면 마니아 드라마가 된단 말이에요(웃음). 어떤 분들은 저희가 일부러 시청률이랑 담을 쌓고 지내는 줄 아시는데 절대로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신다면야 저희도 좋지요. 노 작가님과 제게 떨어진 의문의 숙제라고나 할까요?” 사랑은 모두 고급스럽다대학 시절, 학교보다 시장에 더 자주 갔다는 그는 틈만 나면 영등포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등지를 돌아다니며 사람 구경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워낙 내성적인 탓에 타인과 대화하는 일이 적었던 표민수 PD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흥정에 열 올리는 아주머니, 생선을 나르는 할머니, 악다구니를 피며 싸우는 상인들….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사연이 있었고 각각의 상처가 있었다. 시장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드라마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늘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서려있다. 표민수 PD가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은 2007년에 방영된 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죽이고 감옥에 다녀온 인순이(김현주)가 행복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표민수 PD의 마이너리티를 향한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전과자든 동성애자든, 아픈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그에게는 모두 평등하고 특별한 ‘인간’일 뿐이다. “누구의 마음속에나 베토벤이 있고 소크라테스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고급스러운 건데, 다만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다보니 표현이 허접하게 나올 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늘 가난하고 촌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알고 보면 밝고 경쾌한 트렌디 드라마에도 꽤 오랫동안 애정을 쏟아온 그다. (2008), (2006), (2004) 같은 근작만 살펴봐도 그러한 흐름은 쉽게 감지된다. 현재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 도 마찬가지. 의 송재정 작가와 처음 손을 잡은 이 드라마는 북카페 소유주인 여성 사업가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 박시연과 강지환을 주연으로 내세워 오는 5월 17일 첫 전파를 탈 예정이다. “예전에는 제가 좀 염세적이었어요. 사랑하는 연인을 봐도 행복하기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그동안 너무 슬픔 속에서만 인간을 보려 했던 거 같아요. 을 선택한 건 그런 이유입니다. 보다 밝은 드라마가 하고 싶어졌어요.” 몇몇 사람들은 표민수 PD가 트렌디 드라마에 약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후배들이 만든 나 를 보며 새로운 촬영기법을 눈여겨보고, 유행하는 미국 드라마를 줄줄이 꿰고 있는 그는 누구보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또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장르의 한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해요. 이전의 시트콤에 비해 인간에 대한 해석이 좀 더 강화됐다고 할까요. 전 거기에 희로애락의 감정 플레이를 덧붙여 보려고요. 예를 들어 나 이 드라마에 시트콤을 접목한 스타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면, 은 반대로 시트콤에 드라마를 얹는 형식인 거죠. 를 통해 코미디라는 장르를 ‘극복’했고, 을 통해 스케일이 큰 드라마를 경험했다면, 이번에는 새로운 장르 만들기에 도전해보려 해요.”표민수 PD는 84학번이고 현재 46세다. 1991년 KBS에 입사해 조연출 생활을 5년 했고, 1997년 단막극 로 입봉 했으니 올해로 연출 14년차다. 드라마 PD로서 겪어볼 것은 다 겪어본 이 ‘드라마 장인’에게 20년 가까이 드라마를 만들면서 깨닫게 된 진리를 물었더니 “미리 정해진 스케줄 중 80퍼센트는 반드시 펑크가 난다는 것”이라는 웃지 못 할 대답이 돌아온다. 초치기, 분치기로 돌아가는 드라마 현장을 진두지휘 하다보면 속이 타들어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사고가 뻥뻥 터지는 현장에서 표민수 PD는 보기 드문 스마일맨으로 통한다. 배우가 늦어도 웃고, 소품이 망가져도 웃고, 대본이 늦어져도 웃는 통에 스태프들은 그의 속내를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이놈 저놈 사정 다 들어주다 보면 카리스마가 떨어질 법도 한데 모두들 감독님, 감독님, 모시기에 바쁘니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다. “배우들이 늦거나 해서 현장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스태프들에게 배역을 주고 가상 리허설을 시켜요. 그래도 안 오면 작품에 대해 수다를 떨거나 동전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스태프 중에는 간혹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어요. 배우가 늦으면 혼을 내야 한다고. 근데 그런 식으로 치면 스태프가 늦어도 혼을 내야 하잖아요. 때에 따라 제가 늦을 수도 있고요. 분명 각자 사정들이 있을 텐데 서로 혼만 내고 있으면 분위기만 삭막해지지 않겠어요? (웃음)” 그는 소위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되짚어보는 버릇이 있다. 꼭 취직을 잘해야만 성공하는 것인지, 자식을 잘 기르지 않은 부모는 부모 자격이 없는지, 가난한 가족을 외면하는 것은 죄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인생사에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표민수 PD의 리더십은 이렇듯 타인을 향한 관용에서부터 출발한다. 에필로그드라마는 언제나 선(善)을 이야기한다. 남을 도우라고, 정의롭게 살라고, 그러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덕분에 그것은 종종 ‘판타지’라는 오명을 쓴다. 표민수 PD의 최근작인 의 최종회에 잠언처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드라마처럼 살아라. 이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자신의 드라마를 닮은 그의 선량한 미소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그의 드라마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5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