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일발 로미오와 줄리엣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칭얼거렸던 로미오와 줄리엣. 지금 여기에도 있다. 다들 반대하는 사랑에 눈이 먼 청춘들 얘기다. 다만 눈물 어린 이별을 할 줄 안다는 게 셰익스피어의 아이들과 다른 점이다. :: 칼럼,로맨틱한,시크한,트렌드,엘르,엣진,elle.co.kr :: | :: 칼럼,로맨틱한,시크한,트렌드,엘르

말릴수록 더 집착하는 게 사람이다. 하지 말라면 더 간절해지는 게 사랑이다. 그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 두 사람을 갈라서게 하는 핍박과 장애가 클수록 사랑의 강도가 커지는 이유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유도저항이론’으로 설명한다. 사람에게는 자유를 위협받으면 그것을 다시 되돌리려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이를 연애에 대입하면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악조건이 있어야 사랑이 더 깊어진다는 공식이 성립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있다. 이 주인공들은 아침 드라마처럼 ‘헉’ 소리 나는 막장 수준의 환경에서 지고지순하게 사랑했다. 그들의 나이가 열여섯도 안 됐으니 질풍노도 사춘기에 쏟아진 반대가 기폭제 역할을 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이 죽음이라는 최악의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지금 이 시대의 로미오와 줄리엣들을 나침반 삼아 짐작해봤다.우리 그냥 이대로“젠틀한 남자가 좋더라.”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K(여ㆍ28)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하지만 실제 연애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상에 그렇게 매너 좋은 남자가 없는지 그녀가 연을 맺었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임자 있는 남자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언제 한국을 뜰지 모르는 외국인이었다. 가장 최근의 남자는 여자친구를 종처럼 생각하는 나쁜 ‘놈’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느 화창한 날, 남자의 퍼스트에게 따귀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밥 잘 먹다 불현듯 남자친구가 짐 싸서 고향으로 떠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쯤 되면 주변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말리는 게 인지상정. “이제 그만 끝내라”는 친구들의 청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알겠다는 눈치를 보였지만 그럴수록 더욱 죽고 못사는 사랑에 몰입했다. 말릴 때마다 그녀는 말한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리고 넌 이럴 용기도 없잖아.”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사랑 또한 시련을 맞닥뜨리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담력을 이끌어낸다. 여기에 주변의 반발과 외부 압력까지 가세하면 청개구리처럼 사랑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는 연애 단계 어디에서든 나타난다. 권태기에 시달리는 커플도 해당된다. L(여ㆍ32)의 경우가 그랬다. 남자친구와 교제한 지 3년 정도 지나자 권태기가 찾아왔다. 슬슬 관계의 지속 여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남자친구가 졸지에 백수가 됐다. 그녀의 속내를 알고 있던 친구들은 이 참에 떠나라며 종용했다. 결혼 적령기도 됐으니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 순간 헤어지라는 주변 반응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더니 남자친구와의 유대감이 더욱 견고해지고 혈중 사랑 농도도 진해졌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남자친구 능력을 문제 삼아 헤어지라고 하니까 없던 오기가 생기더라고. 내가 그 정도까지 속물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었나 봐.” 뭐니 뭐니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제 힘을 발휘하는 건 연애 초기 단계에서다. 누구나 익히 경험해 봐서 알겠지만 초반에는 눈과 귀가 멀어지고 세상이 파트너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상대방에 병적으로 집착하는데 관계의 진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 때 발생하는 반항심의 크기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간다. 이때는 잘 듣는 약도 없다. 신앙처럼 사랑도 핍박이 있을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그러다 주변 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기도 한다. P(남ㆍ29)의 경우에는 ‘여우’로 소문난 여자에게 푹 빠져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만류하다가 주먹다짐까지 했다. “여자한테 단단히 홀려 눈에 독기를 품고 10년 우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꼴을 보니까 아찔하더라고. 그깟 사랑이 뭔지 사람을 버려놓았다니까.” 그의 말에 에서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가 죽음을 맞은 로미오의 친구 머큐시오의 절규가 오버랩된다. “네놈들 두 집안 모두 천벌을 받아! 네놈들 두 집안!”위기일발 로미오와 줄리엣500년 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을 택했다.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갈라놓지 못할 영원불멸한 사랑을 이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마신 독약이 마침 불량이어서 둘 다 운 좋게 깨어났다 치자. 그리고 한 달 후, 1년 후 혹은 10년 후까지도 여전히 그들은 함께였을까. 원작은 단 4일 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첫날 사랑에 빠지고, 다음날에 키스하고, 3일째 되는 날 도주했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랑의 감정이 식을 리 없다. 현대판 로미오들과 줄리엣들은 훨씬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최소한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원인은 전국 주유소 기름값처럼 천차만별이다. 앞서 소개했던 L은 심리적 유도저항을 불러일으킬 촉매제를 잃은 케이스다. 백수 애인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자 이러쿵 저러쿵 잡음이 잦아들었다. 희한하게도 간섭과 참견이 사라지자 애인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자극제가 사라지자 반발심과 반항심을 영양분으로 삼던 눈먼 사랑이 힘을 잃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능력과 미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백수 애인의 눈치를 보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거지. 잘해줬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그동안 같이 지냈다는 의리, 우정이었더라고. 그걸 두고 크게 착각했던 거야.” 그후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네가 아니라 연애 자체에 질렸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유도저항이론의 살아 있는 표본과도 같던 K는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제를 의식해 위기를 자초했다. “내가 끼어든 거니까 다른 여자 눈치를 보는 행동을 이해했는데 점점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 난 늘 2순위였던 거 있지.” 일단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자 그녀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대가로 감내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폭풍 같은 연애에 취해 들리지 않던 이야기들이 그제서야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빙산의 일각일 수 있는 남자의 모습에 현혹됐다는 걸 깨닫게 됐다. 외부 압력을 견디지 못해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뜨거운 사랑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일상이 되면서 처음엔 감내하던 것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교 문제가 대표적이다. “불교를 믿는 친구가 기독교 신자와 결혼했는데 남자 집안에서 말이 많은 게 골치였지. 문제가 되는 걸 알면서도 결혼을 밀어붙였는데 한 식구가 되니까 더 심해졌어. 제사할 때 절을 안 한다고, 버릇이 없다고, 어른 말을 듣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야. 그게 쌓이고 쌓여 문제가 터졌대.” 세상에는 사랑의 힘만으로 감내하고 버티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로미오, 줄리엣을 떠나다장애가 있는 사랑은 그 문턱을 인식한 순간 끝이 난다. 사랑의 힘으로 묵인했던 문제들이 현실이 되는 순간 관계를 지탱했던 환상이 무너진다. 위기를 겪은 대다수가 이별을 맞는 이유다. 이때 열이면 열 모두가 말리는 사랑에 푹 빠졌다고 해서 평생 콜레라처럼 지독한 상사병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기억 속에 박제될 때 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마지막은 부침과 갈등의 연속이다. 눈 온 뒤에 비가 내린 도로를 걷듯 질척질척하게 판타지를 빠져나왔는데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 비하를 하기 시작한다. 좋았던 날의 감정은 생각지도 않고 처음부터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한다. 심한 경우 친구들이 왜 그렇게 욕했는지 그 남자의 실체를 알았다며 인터넷 검색창에 ‘살인청부업자’를 입력하기도 한다. 늘 문제투성이의 ‘못된 사랑’만 했던 K도 그랬다. 철없이 거품처럼 들떠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며 그때 왜 뜯어 말리지 않았냐며 화를 낸다. 그러나 객기도 잠깐이다. 연락이 뜸하다 싶어지면 문득 전화해 자랑질부터 시작한다. 요즘 만나고 있는 남자가 있는데 어떻게 할지 고민이란다. “아무리 좋았어도 끝난 건 인정해야지. 과거에 매달리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 그녀의 말처럼 사랑할 때는 뼛속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다고 하지만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하면 원래 모습인 갑남을녀로 돌아온다. 그리고 하늘 아래 한 골목에 하나씩 있는 교회처럼 질펀하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남자’ 혹은 ‘여자’란 이름의 성지가 세상에 반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으로 어학 연수 가서 브라질 친구를 만났거든. 둘 다 귀국하면 영영 헤어질 걸 아니까 서로에게 더 충실했던 거 같아. 그런데 그때는 다른 여자를 못 만날 거 같았는데 아닌 거 있지.” Y(남ㆍ29)의 말대로 아무리 진한 사랑을 했더라도 누군가 떠난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서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적용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 결핍 없는 사랑은 없다. 본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주위에서 나이, 성격, 능력, 외모 등을 싸잡아 이러쿵 저러쿵 간섭한다. 연애의 주연은 개의치 않는 것들이 조연들의 입을 빌려 독이 된다. 결국 이런 세상에서 사랑 모드에 들어서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로미오와 줄리엣 식 사랑의 뒷이야기가 그리 새롭지도 낯설지도 않은 이유다.*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5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