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생각도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동쪽을 좋아해.’라고 결정지은 이후로는 제주의 동쪽에만 머물려고 했다.   최근 마음의 큰 변화가 일었다. 마치 단 한 번의 지대의 변화가 없던 바다 마을에 느닷없이 아파트 15층 높이의 파도가 밀려드는 것처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와르르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겨우 삼십하고 몇 해를 살아놓고서 ‘나는 이래.’라고 규정지었던 것들이 입자 고운 시멘트가 되어 가능성의 문에 꼼꼼히 발려 벽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동쪽을 좋아해.’도 동쪽을 이루는 풍경과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라기보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내 그런 감정을 더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했다.   아무튼 나와 허 감독은 제주 남쪽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제주의 어딘가로 가기로 했다. 딱히 생각나는 곳도 찾아놓은 곳도 없었다. 서핑했던 친구가 자주 갔다던 ‘중문 해수욕장’으로 가기로 했다. 어디든 발 디뎌본 적이 없는 새로움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게 필요했다. 렌터카를 찾고 50여 분을 쉬지 않고 달렸다. 하늘은 유독 맑았다. 날씨가 화창했다.   바다가 보였다. 제주는 가로로 반절을 나눠 위는 제주시, 아래는 서귀포시로 행정상 나뉘어 있다. 중문 해수욕장은 서귀포시, 제주도를 세로로 반절 나누면 아주 약간 서쪽에 있다.   주차장에는 방금 바다에서 나온 듯 서핑 슈트를 반쯤 벗고 바닷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들과 서프보드를 차 옥상에 올리는 사람들,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차에 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둥둥 울리는 신나는 음악을 따라가다 보니 저 아래 파도가 일어 뿌옇게 보이는 바다와 바다 위 서퍼들이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한 광활한 바다와 이른 여름 바다를 즐기는 다양한 사람들.   파라솔 몇 개가 펼쳐져 있고, 거센 파도에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라마 촬영을 시작해 몸을 태울 수 없어 꺼내 입은 긴 팔 티와 긴 바지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는 티를 벗고 햇살 아래를 걸었다.   극적으로 깎아지는 듯한 절벽 아래의 모래사장과 무섭게 부서지는 파도, 부서진 자리에 이는 포말, 포말 속 사람들 사람들의 다양한 자세, 목소리, 대화, 즐기는 저마다의 방법과 마주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느낀 내 감정에 더 심취했는지 모르겠지만 6년 전 첫 유럽여행 때의 프랑스 섬 코르시카의 냄새와 온도를 불러일으키는 처음 가본 그곳이 참 좋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소통하는 기분. ‘아, 정말 그 냄새와 온도를 알아요? 우리는 처음 만나는데 어색하지가 않네요…’   섣부르게 ‘나는 이래.’ 라고 스스로를 가두어 더 보고 더 만날 수 있는 이런 관계들을 숱하게 놓쳤겠다. 이런 인연들을 숱하게 놓쳤겠다.   처음 만난 그 바다는 올해의 우리에게 여름다운 여름의 첫 장면이 되었다.   *김모아 작가의 '제주에서 살아보기'는 매월 첫째, 셋째 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