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을 향해 집을 짓고 창을 내어 풍경을 끌어들였다.

심상준 씨가 경회루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누각.

차분한 벽돌로 둘러싼 입구.

뒤뜰에서 바라본 풍경. 정면으로 계곡과 암석, 용두가산의 녹음 그리고 남산이 보인다.
지난 4월 성북동에 은둔한 성락원이 임시 개방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이를 관리하는 한국가구박물관은 밀려오는 문의 전화에 업무가 마비됐다. 사람들의 각별한 관심에 관계자들이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 대감이 지은 별서로 알려진 성락원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이 별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950년 심 대감의 5대손인 고(故) 심상준 씨가 매입하여 줄곧 사유지로 기능한 성락원은 전통문화에 관심이 높은 사람 사이에서 알음알음 이름을 알렸다. 4800평에 달하는 조선 민가의 정원이 서울 도심에서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담양 소쇄원, 완도 부용동과 더불어 ‘조선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성락원은 자연 지류에 따라 앞뜰, 안뜰, 뒤뜰로 나뉜다. 계곡물이 가는 물줄기를 이루며 떨어지는 앞뜰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도심을 벗어나 자연에 안겼다는 안도감을 심어주는 한편, 안뜰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심 대감은 앞뜰에 흙을 쌓고 나무를 빼곡히 심어 용의 머리를 닮은 인공 둔덕, 용두가산(龍頭假山)을 조성했다. 용두가산을 왼편에 끼고 오솔길을 돌아 나오면 좁은 시야가 한순간 트인다. 안뜰에 들어선 것. 수백 년 묵은 고목으로 둘러싸인 풀밭 한가운데에 거대 바위가 에워싼 아담한 연못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한편, 귓가에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와 닿는다. 거대한 자연석이 뿜는 강건한 기운에 경탄하고, 그 돌들이 감싼 연못의 그윽한 기운에 정신이 맑아진다. 정원의 테두리를 이룬 다종다양한 나무들은 연두색부터 남청색까지 각자 개성 있는 빛깔을 뽐낸다.
우리의 정원 문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양은 물론 이웃한 중국, 일본과 뚜렷이 구분되는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아래 인공이 결코 자연을 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찾아나서는, 발견의 영역, 여정에 해당합니다.” 한국가구박물관 박중선 이사의 설명이다. 그리하여 성락원에서는 사람이 개입한 흔적을 한눈에 찾기 힘들다. 앞뜰의 둔덕이 사람이 일군 결과라지만, 이를 모르면 감쪽같이 자연의 일부로 보인다. 한편, 눕듯이 걸터앉아 더위를 식힐 법한 너른 바위들을 면면이 살피면 뜻밖에도 선조의 흔적과 맞닥뜨린다. 바위 곳곳에 음각으로 글씨를 새긴 흔적들이다. 그중 연못 서편 암벽에 새겨진 ‘장빙가(檣氷家)’라는 글씨가 유독 생동한 기운을 내뿜는다. ‘큰 고드름이 열리는 집’이라는 뜻을 품은 이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남긴 작품이다. 암벽 맞은편에 내려앉은 한옥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실제로 겨울이면 이 집 처마에 팔뚝만 한 고드름이 달렸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 앉은 한옥은 고재를 어렵게 구해 1990년대에 지은 집이다. 사람이 정원 속 자연에 개입한 또 다른 흔적을 찾는다면 연못 복판에 반쯤 잠긴 돌절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사각으로 다듬은 돌의 중심을 반구 모양으로 파낸 절구의 기능은 여러 갈래로 해석된다. 반구에 고인 물에 달을 비춰 감상할 목적이었거나 이곳이 천연의 자연이 아닌 누군가의 정원임을 표시할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여러 각도에서 못과 바위, 암벽, 그 사이의 숨은 작은 생명에 눈을 맞추며 돌계단을 오르면 제법 존재감이 큰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1953년 심상준 씨가 암반에 지은 이 누각은 높은 장대석이 받치고 선 모습이 흡사 경회루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심 씨는 정자와 나란한 계곡을 콘크리트로 에워싸 물을 가둬 못을 만들었다. 박중선 이사는 차후에 진행할 보수 공사 때 이 콘크리트를 거둬 예전처럼 물이 흐르고 폭포를 이루게 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폭포가 흐르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안뜰을 향해 뒤돌아섰다. 그런데 이때 밭밑에 펼쳐진 안뜰에 앞서 정면으로 용두가산이 이룬 푸른 물결과 그 너머의 능선, 그리고 파란 하늘이 시야에 먼저 들어찼다. 흐릿한 능선의 한 지점에 N서울타워가 있는 걸 보니 남산일 터. 박 이사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별서이자 정원으로 쓰인 역사가 조선 이전 시대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손에 잡히는 증거가 없는 한 가설에 불과하지만 물, 숲, 산, 하늘이 수놓은 창창한 풍경을 목도하니 누구든 이곳을 발견하면 집을 짓고 창을 내어 풍경을 담길 원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봄날 잠시 머문 성락원에서 수백 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자연의 은혜로운 아름다움과 인간의 보편타당한 안목을 새삼 깨닫고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