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살아보기' #6 봄의 색과 선과 모양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김모아 작가의 감성 깊은 제주일기 여섯 번째. 제주의 봄에 만난 색과 선과 모양들에 관하여. | 제주,제주도,제주에서살아보기,여행,김모아

봄을 맞았다  봄을 만났다 봄을 보았다    처음 맞는 제주의 봄. 매번 가는 산책길에서 제주 첫 봄의 색과 선과 모양을 마주했다. 다 뽑힌 검은 무밭에 까까머리처럼 초록 잎이 다시 올라오고 겨울과 초봄, 억새와 민낯이 드러나 갈색빛이던 나시리 오름의 연한 갈색빛은 어느새 잎이 무성한 나무와 풀들로 초록이 되었다. 길 양옆 돌담 아래에는 빨갛고 동그랗고 뽀송한 작은 산딸기들이 몽글몽글.     지나가던 트럭이 잠시 멈추더니 노부부가 말을 걸었다. “그거 먹을라고? 맛나! 많이 따 가! 서울에서 놀러 왔어? 하나만 줘봐, 맛만 볼게.”   왼손 가득 놓인 산딸기 중 실한 열매 하나를 드렸다. 씻지도 않은 딸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몇 번 씹어 삼키시곤 흙먼지를 날리며 유유히 사라지셨다.      가시를 잘 피해 손을 깊숙이 넣고 숨어있는 통통한 딸기를 살포시 잡아당긴다. 포근한 소리를 내며 산딸기는 줄기에서 내 손으로 옮겨진다. 눈이 부셔 쓰고 나간 밀짚모자에 한 아름 담았다. 늘 다니는 산책길이라 15분이면 숙소로 돌아가는데 이날은 30분이 넘게 걸렸다. 봄에 쑥을 캐고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는 어머님들의 재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딸기 한 움큼을 바구니에 담아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었다.   물기를 툭툭 털고 키친타월에 올려 잘 닦았다. 상처가 있는 딸기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제주 봄이 입안 한가득.   생각지도 못한 봄의 생기로 아침을 달랬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벌써부터 여름의 더운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이 느껴졌다. 청바지와 티 안에 혹시 몰라 챙겨온 수영복을 입었다. 바다로 가야 했다.   차 창문을 모두 활짝 열고 엑셀을 밟았다. 출발. 성산 일출봉에서부터 해안 도로를 따라 동쪽 위로 달렸다. 세화해변과 평대, 월정리를 지나 김녕 해변까지 다다랐다. 바람이 거센지 끝부분으로 갈수록 날렵해지는 삼선의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파랗고 맑았다. 저기 수평선은 반듯한데 바다로 다다르는 길은 울퉁불퉁. 모래를 밟고 풀숲을 지나 바다에 점점 가까워졌다.     김녕 성세기 해변에서 보는 바다는 ‘여름의 피서객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라고 은근한 자신감을 뽐냈다.   푸르고 파랗고 넓고 잔잔했다. 이등변 삼각형을 반으로 접은 모양의 긴 돛을 달고 투어를 나가는 요트가 에메랄드빛 바다를 가로질렀다. 바닷물이 빠져 드러난 곱고 하이얀 모래사장으로 걸어갔다. 준비해 간 담요를 깔고 청바지와 티를 벗고 시원한 바람의 가운데,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앉았다.     구름은 파아란 하늘에 하얀 물감을 물에 섞은 후 맘 가는대로 흩뿌려 놓은 듯 자유롭게 피어있고, 영어를 쓰는 남녀 커플은 나와 같은 시원한 수영복 차림으로 공을 차고 있었다.   잠깐 바닷물에 발을 담갔는데 차가웠다. 아직은 이르구나… 원래 가을 바다가 더 따뜻하다고 한다. 여름 내내 데워진 바다가 밀려와서.     바닷바람이 세서 10분도 채 되지 않아 온몸에 닭살이 일었다. 티셔츠를 입었다.   바다는 짙은 푸름과 에메랄드 색과 코발트 색, 파란색, 검은색, 하얀색, 연초록색, 무색 등 여러 색을 다 품고 있었다. 해는 천천히 사선으로 기울며 수면 위에 진주를 알알이 박았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투명한 봄 바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궂은 때가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어나서 청바지도 입었다. 아까 젖었던 부분이 채 마르지 않은 채로 담요를 탈탈 털어 봄의 초록으로 향했다.    제주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날씨, 밝고 맑고 청량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1주일 중 이틀을 제외하고는 흐린 날, 궂은 날이 대부분이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뀌고, 멀어봤자 2시간 안에 오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지역마다 날씨가 다르다.   이날도 그랬다.     용이 누워있는 오름 같아 ‘용눈이 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오름으로 향했다. 그곳에 올라 능선 윗단에 서서 360도를 돌면 아… 제주 중산간에 듬성듬성 놓인 묵묵히 제자리에서 단단한 힘을 뿜어내는 오름이 나를 둘러싼다. 이날도 어김없이 화구가 움푹 파인 다랑쉬 오름 위에 동그란 구름이 얹혀 있었다. 날이 흐려도 도넛을 닮은 구름 모자를 쓰겠다며.    하늘은 탁해졌다 그 덕분에 오름의 녹은 더 그윽해졌다 더 짙어졌다, 아빠의 굽은 등을 닮은 능선들이 겹겹이 겹쳐진 전경. ‘자연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유연하고 유하게 이뤄져 있었어…’   새삼스러운 감탄의 눈과 입으로 용눈이 오름을 한 바퀴 돌았다. 걷는 길은 화산송이가 놓여있는 황토색. 땅을 흙을 자연을 밟는 두 발은 편안했다. 쉬지 않지만 쉼이 되는 걸음. 이 날 만보를 넘게 걸었다지.      만져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부드러운 선들의 감촉. 마음의 안정이 찾아들면 이상하게도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시대의 ‘부풀어 오름’을 끌어안고서 만인의 발길을 허락해주는 오름에서 내려왔다.   내가 만난 제주의 첫 봄은   빨갛고 동그랗고 폭신하고 맛있고 푸르고 반듯하고 투명하고 뜨겁고 탁하고 짙푸르고 부드럽고 유연했다.    깊은 밤이 되도록 함께 이 하루를 보낸 친구와 제주 첫 봄의 색과 선과 모양들을 이야기했다.   *김모아 작가의 '제주에서 살아보기'는 매월 첫째 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