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파리의 아파트로 델피나 델레트레즈 펜디(Delfina Delettrez Fendi)가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다다르자, 타임슬립처럼 다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미끄러진 듯 주위의 온도가 달라진다. 아파트는 미국의 시대물 <매드맨>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독특한 시선으로 편집한 이탈리아 드라마 같다고 할까, 잘 정돈된 공간 속에서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 이제 서른한 살이 된 델레트레즈는 타고난 예술적 감각으로 베네치아 램프와 로마의 기둥, 나폴리의 오래된 타일, 중세의 이탈리아 가구 등 앤티크 오브제들을 한데 모아 절묘하게 배치했다. “심지어 욕실은 60년대풍으로 꾸몄어요”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델레트레즈는 아티스트인 남편 니코 바첼라리(Nico Vascellari)와 쌍둥이 아들, 11세인 딸 엠마와 함께 주로 로마에 머물지만, 펜디 소유의 이 아파트는 지난 10년간 그녀에게 제2의 집과 같았다. 파리에 왔을 때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고, 아파트 창밖의 활기 넘치는 거리에 매료돼 자신의 아지트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생제르맹 거리가 보이는 이 공간 속에서 미묘하고 예상치 못한 연결성을 느꼈어요. 그런 감정이 마음을 사로잡았죠.”그녀가 수집한 독특한 장식품들은 아파트에 색다르고 유쾌한 분위기를 더한다.델레트레즈의 주얼리 컬렉션은 시대를 초월한 정통 클래식 기법과 모던한 감수성이 특징이다.건축가이자 제품 디자이너, 지오 폰티가 만든 쌍둥이 거울은 펜디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다.델레트레즈는 펜디 액세서리와 멘즈웨어 컬렉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의 장녀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유년 시절에 아름다운 오브제로 가득한 이탈리아와 브라질을 오가며 지냈다. 거실 벽면에 쌍둥이처럼 걸려 있는 지오 폰티(Gio Ponti)의 두 거울이 그녀의 유년 시절과 닮았다. “거울은 원래 할머니 것이었는데, 어머니의 로마 집 입구에 걸려 있었죠.”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어머니가 처음 이 아파트에 왔을 때 이 거울을 선물했어요.” 다이닝 룸 한쪽, 식기 옆에 놓여 있는 금테 장식의 리모주 도자기도 할머니 것이었다. 이렇게 그녀의 아파트 곳곳에는 펜디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물건들이 자리한다. 델레트레즈의 장식적 취향에는 다소 어둡고 마니아적 성향이 묻어나지만, 공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따뜻하다. 그녀가 이 아파트에 이사 왔을 때, 가장 먼저 바닥을 덮고 있던 클래식 카펫을 벗겨내고 헤링본 패턴의 나무 바닥을 장식했다. 다이닝 룸 중앙에 있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부터 시작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놓여 있는 장식품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여러 지역의 플리마켓과 앤티크 상점을 오가며 모은 것들이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금속 소재의 동물과 곤충 오브제, 빈티지 꽃병 등을 가리키며 ‘메탈 동물원!’이라고 소개한다. “이 오브제들은 때로는 달콤하지만, 때론 이상해 보이기도 하죠.” 독특한 오브제들 사이에는 10여 년 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론칭한 주얼리 액세서리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미술에 펑크와 유쾌함을 절묘하게 녹여낸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최근 컬렉션은 물방울을 불어넣은 듯한 디자인으로, 특히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골드 이어링이 눈에 띈다. “이 주얼리들은 실제로 ‘버블 블로어’ 기법으로 불어서 만든 것이에요.” 아이디어는 지난해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생각했다고 덧붙인다. 그녀의 스타일도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옷을 입을 때 점점 주얼리를 덜어내게 됐어요. 심지어 가방도 들지 않고요. 보시다시피 이런 차림새를 즐기게 되었죠.” 와이드 칼라 셔츠와 이번 시즌 펜디 멘즈웨어 컬렉션의 유틸리티 벨트를 가리키며 더욱 실용적인 스타일을 찾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녀에게선 더 이상 아찔한 높이의 힐을 찾아볼 수 없지만, 눈가에 아이라이너가 번진 듯한 특유의 세련된 스모키 메이크업은 여전하다. 서로 다른 것들이 생경한 조화를 이루는 아파트에서는 긴 하루를 마친 델레트레즈가 편한 차림으로 느긋하게 ‘넷플릭스’를 보는 모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거실은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꼭 필요한 가구만 있을 뿐, 매일 생활하며 생길 법한 흔적도 거의 없다. 반쯤 마신 찻잔이나 미처 읽지 못한 신문, 문서 더미조차 찾을 수 없다. “맞아요. 그건 저도 최근에 깨달은 부분이에요. 이 집을 그리 편안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심지어 아늑한 휴식을 즐길 소파조차 갖추고 있지 않아요.” 종종 바닥에도 앉는다고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 TV를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런 모습을 제 자신으로 규정짓고 싶지 않아요.” 대신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는 침실로 향한다. 빛이 간헐적으로 비추는 침실에도 가구가 드문드문 놓여 있고, 양가죽이 덮여 있는 침대엔 파리시(Parisi) 디자인의 가죽 램프가 주위를 밝힌다. 어떤 가죽인지 묻자 “인간 가죽요!”라며 짓궂게 농담을 던진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침대에 누워 밖을 봐요. 가벼운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는 모습이 제게는 모빌처럼 느껴져요.” 델레트레즈에겐 주변의 모든 것이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다. 생제르맹의 북적이는 거리를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극장 제일 앞줄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마치 스크린을 보는 것처럼 프레임 너머로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다투는 모습, 아마추어 연주가의 기타 소리, 심지어 사랑에 빠지는 장면까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