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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를 기다리는, 이토록 한적하고 달콤한 이유 ::사랑, 연애, 정우성, 엘르, 연애이야기, 사랑이야기:: | 사랑,연애,정우성,엘르,연애이야기

마스크 없이는 나갈 수 없는 아침이었다. 한남오거리에서 남산타워가 안 보이는 날씨. 목이 잠기고 눈이 따가워도 일은 해야 하지만 이런 날은 기분도 능률도 바닥이었다. “오늘 일 좀 했어?” 누가 물어오면 “아, 힘들었어. 미세먼지 때문에”라고 핑계 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할 일도 아니었다. 미세먼지와 우울한 심정의 관계는 이미 명백하고, 마음에 낀 미세먼지가 업무를 방해하는 것도 당연한 거니까. 창문도 열 수 없고 산책은 언감생심이었던 날, 사무실에선 거의 모든 일이 지지부진 했다. 미세먼지의 공포는 보이지도 않는데 피할 길이 없다는 데 있고, 일의 공포는 이런 일정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데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명치 언저리에 나비 한 마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오늘 열심히 하면 내일 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과 내일의 업무량을 조절할 수 있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일은 늘 쌓여 있어서 끝이 없었다. 쫓기는 일 하나 없이 깔끔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올까? 스위스나 발리에서 봤던 맑은 하늘을 서울에서도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사는 것도 다 미세먼지 때문 아닐까? “며칠 동안 그렇게 같이 지내고 나면, 돌아와서 며칠은 쉽게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더 보고 싶어. 여행 가기 전보다 다녀온 다음이 더 보고 싶어.”“그렇죠? 나도 그래요. 큰일이야.”지난 주말의 우리는 서울에 없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를 봤다. 서울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고 오래 걸었다. 아직 들어가서 놀 수는 없는 바다 앞에선 폴짝 뛰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좀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둘이서 한참 웃었으니까 그걸로 좋았다. 다녀온 후에는 그 사진을 몇 번이나 꺼내 봤다. 지나간 순간이 막막한 지금을 이렇게 위로하는구나, 혼자 생각하면서. 그 곳에서의 아침이 우리의 밤만큼 좋았던 건 왜였을까? 한시간도 넘게 같이 걸었던 산책로에선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새소리를 들었다. 또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저 숲에선 유니콘이 달려나올 것 같아.” “이 꽃이름은 뭐예요?” “와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봐.” 우리는 그렇게 몇 가지 꽃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고, 저 깊은 곳에 유니콘을 감추고 있는 숲의 좌표를 공유하게 됐다. 오늘 미팅은 어땠는지, 얼토당토 않은 소리로 복장 터지게 하는 상사는 없었는지, 혹 서러운 일은 없었는지를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고루 섞여 있었던 산책로. 팽팽해진 종아리와 허벅지, 피부를 코팅한 것 같이 흘린 땀, 살짝 가빠온 숨 그대로 우리는 그날 아침을 완벽하게 소유했었다.사람은 원래 사무실에서 일을 하도록 태어난 게 아니라는 말은 누가 했었지? 돌아온 후의 일상은 철 지난 낙엽처럼 버석거렸다. 며칠 전엔 그렇게 자연스럽게 행복했는데, 서울은 거대한 낙엽의 도시 같았다. 사람도 대기도 건조했다. 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니콘처럼 숨어있는 것 같았다. 며칠을 같이 지낸 시간이 그렇게 또렷했는데, 또 며칠을 만날 수 없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게 영 어색했다. 자의와 타의 사이에서 매캐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은 바쁘게 흘러간다는 게 이 뿌연 도시의 위안일까? “이제 씻고 누웠어요. 개운해.”“오, 그럼 지금 전화해도 돼요?”“응!”늦은 밤, 늦은 샤워, 늦은 통화, 오늘은 처음 듣는 목소리. 새삼스럽게 안부를 묻고 온갖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맘껏 웃고 나면 거짓말처럼 이완됐다. 몸과 마음이 풀리고 나면 잠이 쏟아졌다. 피곤해서 눈 감는 밤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잠을 환대하듯이, 아주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졸음과 새로 친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자야죠? 나 갑자기 너무 졸려.”“잘자요. 행복해.”내일 아침에도 그때처럼 산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급하게 씻고,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어제 다 못한 업무를 마주하겠지. 하지만 어제와 똑 같은 일상이 내일도 이어질 거라는 불안, 오늘 밤에 들었던 목소리를 내일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 오늘밤엔 북서풍이 불어올 거라는 예보를 들었다. 내일 아침은 모처럼 맑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