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디자이너들이 꽃에 꽂혔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차디찬 계절을 견뎌낸 꽃들이 봄의 포문을 연다. 이 작은 존재에 깃든 강인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디자이너들의 러브 스토리::꽃,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 드리스 반 노튼, 디올 맨,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로에베 플로렌스, 영감, 디자인, 패션, 엘르, elle.co.kr:: | 꽃,디자이너,버질 아블로,드리스 반 노튼,디올 맨

1 패션계의 소문난 ‘네이처 긱’ 드리스 반 노튼. 2 수천 송이의 장미로 만들어진 디올 맨의 카우스 피규어. 3 이번 시즌 런웨이 위에 꽃을 수 놓은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4 은퇴 후 꽃꽂이를 꿈꾼다는 버질 아블로.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꽃 가게를 열 계획이에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롯이 꽃꽂이에 집중하려고요.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모르겠어요.” 얼마 전 파리 코스테스 호텔에 액세서리 팝업 스토어 ‘플로럴 숍’을 오픈한 버질 아블로가 <WWD>와 나눈 인터뷰 내용의 일부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패션 레이블 중 하나인 오프화이트™의 수장이자 루이 비통 남성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남부러울 것 없이 완벽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그가 귀농 후 꽃꽂이라니!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나? 더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미세 먼지 주의 경보가 울리는 서울에서라면 없던 생각도 생길 수밖에 없을 것. 최근 도시를 벗어나 꽃과 정원, 숲 등 자연에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 ‘네이처 긱(Nature Geek)’이 급격히 느는 추세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도시적인 삶을 살 것 같은 디자이너 중에서도 옷보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네이처 긱이 있다. 이들은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며, 일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꽃에 파묻혀 정원을 가꾸는 일에 몰두하곤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드리스 반 노튼을 꼽을 수 있다. 여성과 남성 컬렉션까지 1년에 꼬박 네 번의 쇼를 선보여야 하는 살인적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리에 거주하지 않는다. 대신 벨기에의 작은 소도시 리르에 있는 저택에 머물곤 하는데, 7만3000평이 넘는 광대한 정원에는 45종이 넘는 수국을 비롯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품종의 꽃들이 자라고 있다. “나는 정체성을 정원에서 찾는다. 정원은 늘 내게 겸손을 가르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까지 제시해 준다”는 말은 디자이너이자 한 사람으로서 그가 꽃과 나무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매년 봄마다 꽃의 테마를 정해 자신의 정원을 꾸민다. 테마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꽃은 다음 시즌 드리스 반 노튼의 컬렉션을 구성하는 메인 프린트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런가 하면 특유의 섹슈얼하고 마초적인 이미지가 꽃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톰 포드 역시 패션계의 대표적인 네이처 긱 중 한 명. 잦은 출장 스케줄 속에서도 틈틈이 꽃과 자연에 파묻혀 지낼 궁리를 한다고. 패션쇼를 열 때마다 모델에게 행운의 표식으로 은방울꽃을 손에 쥐여줄 만큼 꽃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무슈 디올.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100만 송이가 넘는 생화로 가득 채운 향기로운 무대에서 오트 쿠튀르 컬렉션 신고식을 치른 라프 시몬스부터 장미로 제작한 대형 카우스 피규어를 무대 한복판에 세운 디올 맨의 킴 존스까지, 무슈 디올의 계보를 잇는 디자이너들에게 꽃은 늘 그들의 런웨이를 구성하는 주요 DNA이자 보다 완벽한 무대를 완성해 주는 장치로 사용돼 왔다.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로에베 플로렌스’.꽃에 대한 애정을 대중과 함께 공유하는 이들도 있다. 평소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종종 꽃과 화병 사진을 올리던 조너선 앤더슨은 로에베의 창립 170주년을 기념해 마드리드에 ‘로에베 플로레스’라는 꽃집을 열었다. 직접 고른 화병부터 인테리어까지 스토어 곳곳에 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감각적인 가드닝 제품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고. 플로리스트가 직접 상주하며 꽃꽂이부터 다듬기, 화병에 보관하는 방법 등 가드닝에 관련된 다양한 튜토리얼을 제공하고 있어 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꼭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은 성지 순례 코스로 손꼽힌다. 플로리스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사관학교라 불리는 런던의 ‘맥퀸즈(McQueens)’는 지금은 고인이 된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꽃집이다. 평소 무대를 비롯해 의상에도 생화를 수놓을 만큼 꽃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그는(실제로 2007 S/S 컬렉션 당시 수국으로 만든 드레스를 등장시켜 화제가 됐다!) 자신의 컬렉션을 전담하던 플로리스트 칼리 엘리스와 함께 1991년 쇼디치에 플라워 숍을 열었다. 이후 맥퀸즈는 왕실 공식 일정부터 주요 브랜드의 이벤트까지 꽃과 관련된 모든 일을 섭렵하며 오늘날 런던을 대표하는 플로럴 숍이자, 전문가를 양성해 내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고 맥퀸의 절친이자 그의 뒤를 이어 브랜드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라 버튼 역시 자신의 런웨이 주요 소재로 꽃을 사용하곤 하는데, 2015년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활짝 핀 장미는 완벽하죠. 하지만 제겐 시들어버린 장미가 더 흥미로워요. 불완전한 아름다움, 늙어가는 여자의 아름다움이죠. 이런 자연의 순리를 통해 젊음만큼 나이가 드는 것에도 우아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하죠”라며 꽃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스텔라 매카트니,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등 꽃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사랑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유독 디자이너들이 꽃에 심취하는 건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외관에 이끌리는 직업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시 한 번 드리스 반 노튼의 말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본다. “저는 패션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매우 공허한 단어예요. 6개월이 지나면 끝나버리는 말이라, 좀 더 시간을 초월한 단어로 제 삶을 정의하고 싶어요.” 그의 말처럼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1년이 넘는 시간을 고민하며 밤새워 만든 옷이 대중에게 선보이고 판단되는 시간은 불과 15분 남짓. 땅속에서부터 인고의 시간을 거쳐 꽃을 피우지만, 1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저버리는 가여운 존재로부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는지? 확실한 건 꽃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애정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라는 것. 우리는 그저 이 향기로운 유행에 몸을 맡긴 채 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