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라붐> 속 주인공들의 볼드숄더 아웃핏. 2 메탈릭 파워 수트를 입은 TLC. 3 청청 패션을 스타일리시하게 소화한 다이애나 스펜서.며칠 전 성대하게 열린 펜디의 ‘바게트프렌즈포에버’ 이벤트를 보며 2000년대 사회 초년생 시절, 바게트 백을 사고 싶어 안달했던 에디터는 감회가 남달랐다. 1997년에 이 백을 처음 선보인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인스타그램에서 어린 친구들이 엄마의 바게트 백을 들고 다니는 사진을 본 뒤 생각했어요. 때가 왔다고 말이죠. 그래서 이번 시즌엔 다양한 소재와 크기의 바게트 백을 다시 소개하기로 마음먹었어요”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에 유행했던 디올의 새들 백이나 92년 국제요트대회 미국 국가대표 팀이 입었던 유니폼을 복각한 폴로 랄프 로렌 등 패션계는 뉴트로(New-tro)가 대세다. 기성세대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에게 옛 문화를 즐기는 새로운 놀이, 뉴트로. ‘레트로’가 30~50대가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복고에 빠져드는 것이라면 ‘뉴트로’의 주체는 밀레니얼과 Z세대다. 경험하지 못한 옛것에서 새로움을 느끼며 복고에 열광하는 현상인 것! 퀸이 전성기를 누릴 무렵(4050세대)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1020세대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열광하는 것을 비롯해 80~90년대의 경험들을 재해석한 압구정 도산분식, 익선동 전자오락실, 을지로 커피한약방이 #핫플로 인기 있는 이유도 그것.1 80년대를 사로잡은 파워플 우먼 마돈나. 2 청청 패션을 스타일리시하게 소화한 브룩 실즈. 3 체크와 각진 어깨 의상으로 점철된 영화 <헤더스>.특히 80~90년대는 패션계에서 크리에이티브가 보석 같이 넘쳐나던 시대로, 돌고 도는 패션 사이클 속에 끊임없는 영감을 선사하는 단골 시대였다. 한국의 80년대를 떠올려보자. 88 서울올림픽이 개최됐고, 송골매와 같은 록 밴드가 무대를 휩쓸었으며, 김완선의 무대 매너와 패션은 많은 여성이 따라 하기 바빴다. 패션과 음악, 출판 등 대중문화의 호황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사회는 불안정했다. 반면 경제 호황을 누린 미국은 젊고(Young), 도시(Urban)에 살며, 전문직(Professional)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패션을 비롯해 자신에게 돈 쓸 줄 아는 사람들을 일컬어 여피(Yuppie)라 부르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피족이 이끈 패션은 여성스러움(페미니즘 운동이 80년대에 이르러 꽃을 피운 만큼)보다 자신감과 글래머, 액티브를 내세우며 ‘오버’의 미학과 ‘애슬레저’ 룩의 유행을 함께 키웠다. 영화 <워킹 걸>의 시고니 위버가 입을 법한 각진 어깨의 오버사이즈 파워 수트를 비롯해 데님과 그래피티 셔츠, 스니커즈, 스터드, 십자가와 체인 목걸이, 란제리, 튀튀 스커트 등을 정신없이 믹스매치한 마돈나의 오버 스타일링은 전 세계 패션에 영향을 미쳤다. 파워플한 페미니즘과 함께 트랙수트를 필두로 한 애슬레저 룩이 주목받은 것도 이 시기. 에어로빅과 스쿼시 열풍에 빠진 여피 우먼들은 운동을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가 뾰족한 스틸레토 힐로 갈아 신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맥시멀리즘이 군림한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엔 반항적인 태도와 ‘쿨’한 애티튜드가 장악했다. 단순함과 순수함에 집중한 슬릭한 실루엣의 도회적인 스타일, 즉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스타일 아이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케이트 모스는 슬립 드레스와 심플한 로고 티셔츠, 스트레이트 팬츠로 패션계 판도를 바꿔놓았고, 1990년대 여성 힙합 그룹 중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린 TLC는 브라톱과 트레이닝 팬츠, 오버올 등의 아이템을 선보이며 섹시하고 파격적인 힙합 패션으로 주목받았다.1 그래피티 셔츠와 데님, 체인 액세서리 등 오버 스타일링의 대표주자 마돈나. 2 바이커 쇼츠를 입은 다이애나 스펜서.지난 몇 시즌부터 꾸준히 패션계를 장악한 건 단연 80~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애슬레저 룩이다. 2019 S/S 시즌의 샤넬 런웨이는 우아한 트위드 재킷에 바이커 쇼츠를 매치한 스타일링이 주를 이뤘으며, 펜디 쇼에도 킴 카다시언과 벨라 하디드, 헤일리 볼드윈이 즐겨 입는 바이커 쇼츠 코디네이션이 즐비했다. 마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1998년 오버사이즈 스웨츠셔츠에 바이커 쇼츠와 대디 스니커즈를 매치한 룩이나 다름없다. ‘스포츠 트위스트’의 테마 아래 유스 컬처를 대변하는 오프화이트도 보다 선명해진 형광 색조를 내놓으며 뉴트로 열풍에 동참했다. 한편 파워 숄더의 컨템퍼러리 버전이랄까? 어깨를 잔뜩 강조한 브랜드도 많았다. 발렌시아가와 마크 제이콥스, 막스마라 등의 런웨이에는 볼드한 어깨 라인을 강조한 팬츠 수트들이 등장했으며, 루이 비통은 어깨를 강조해 플라워 프린트를 가미한 잔다르크 스타일의 스페이스 수트를 선보였다. 이 외에도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청청 패션과 블리치 데님(디올, 발망), 타이다이 프린트(스텔라 매카트니), 벨트 백(알렉산더 왕)이 등장하며 순식간에 과거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1 심플한 로고 티셔츠만으로도 아름다운 케이트 모스. 2 그래피티 셔츠와 데님, 체인 액세서리 등 오버 스타일링의 대표주자 마돈나. 3 브라톱, 트레이닝 팬츠로 섹시하고 파격적인 힙합 패션을 선보인 TLC.2019년 버전의 뉴트로가 과거의 레트로 패션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기성세대에게 뉴트로 룩은 수없이 재현된,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패션 트렌드라 치부할 수 있지만 뉴 제너레이션에게는 기존 질서를 거부했던 과거의 반항적 트렌드가 단순히 패션을 넘어 그들의 감성을 터치하며 정서적인 면을 어루만진다. 게다가 옛것을 재구성해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개성과 희소성을 찾아주기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 특성과도 맞물린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요즘엔 좀 더 상업적인 룩과 전혀 새로운 의상을 보여주려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하지만 2019 S/S 시즌엔 과거로 돌아가 우리 로고를 새겨넣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저에게 과거란 늘 현재와 같은 의미니까요.”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 뉴트로는 촌스러운 과거의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패션보다 힙(!)하면서 가장 동시대적이며, 인스타그램에 ‘좋아요’가 무한정 달릴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패션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