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하루가 완벽해졌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아주 사소한 이유로 산산조각 났던 내 하루가 갑자기 완벽해졌다. 당신 덕분에 ::일상, 연애, 사랑, 데이트, 일, 인비트윈, 애인, 남자친구:: | 사랑,연애,일,인비트윈,정우성

대단한 아침은 아니었다. 중요한 일, 긴장되는 일정이 있어서 각오가 필요한 날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날, 매일처럼 평범한 날, 일상을 좋게 소화하기 위한 몇 가지 다짐을 했을 뿐이었다. 일어나서 원고를 쓰고 요가 수련을 해야지. 다녀와서 점심 식사를 정성껏 차려 먹어야지. 오후엔 몇 가지 미팅을 하고 관공서 몇 군데에 다녀오면 저녁 시간이 될 거야. 모처럼 약속이 없는 밤에는 책을 읽고, 잠들기 전까지 다시 원고를 써야지. 잠들기 전에 이튿날 아침 일정을 설계하는 건 건강한 습관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자면 실제로 그렇게 보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혼자서 하는 생각. 한정된 시간의 한 토막까지 내 시간으로 만드는 아주 사소한 비밀일 뿐이다. 혼자서 고개 숙이고 외는 유쾌한 주문 정도로 여긴다. “정말 미안해요. 이따 하기로 한 미팅을 좀 당길 수 있을까요?”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 잠금 화면에 이런 메시지가 떠 있었다. 당길 수는 있어도 미룰 수는 없는 미팅이었다. “네, 그럼 오전 11시 즈음 뵐까요? 네, 네, 좋습니다. 고맙습니다!”이 전화 통화가 최초의 도미노였다. 11시 약속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원고를 쓰려면 최소한 3시간은 확보돼 있어야 했다. 오로지 혼자일 수 있는 시간, 양질의 집중이 가능한 시간이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은 1시간 반 남짓이었다. 미팅이 정오 즈음 끝나면 수련도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집밥을 차려 먹겠다는 일정도 고스란히 사라졌다. 그래도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일의 순서를 약간만 바꾸면 문제 없었다. 채 시작도 않은 하루,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오늘 안에만 마무리하면 되는 거니까. 혼자 정한 일정 같은 건 흔들려도 괜찮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원고를 쓰려고 앉았을 때 도착한 문자 한 통이 남은 하루를 제대로 뒤틀어버렸다. 내가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나한테 지대한 영향을 주는 타인의 일, “오늘까지 반드시 완수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어 미안하다”는 문자였다. 태도도 엉망이었다. 미안하다는 기색, 만회의 의지도 없었다. 이렇게 됐으니 그리 알라는 통보에 가까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예의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엄격해야 하지 않나? 일상은 아주 연약한 동심원 하나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원 안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 밖에는 무슨 수를 써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상상하는 식이었다. 원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타인이 원 밖에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과 말, 선의와 적의를 포함한 크고 작은 마음들까지. 그렇게 도식화 하면 상황을 좀 쉽게 정리할 수 있게 됐다. 포기해야 마땅한 상황에 필요 이상의 애착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음이란 얼마나 연약한지, 하루는 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깊이 실망해서 산란해진 마음으로는 짧게나마, 어디에도 집중할 수도 없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마무리하자”는 문자를 보내 놓고는 다시 샤워를 했다. 미팅은 소득 없이 길기만 했는데 그대로 점심 식사까지 뻔뻔하게 이어졌다. 먹는 둥 마는 둥 의미 없는 농담만 가득했다. 관공서에 갔을 땐 빼먹고 온 게 너무 많았다. 인감 도장은 사무실에 두고 왔다. 인감증명은 3개월이 지나서 쓸모가 없었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왔을 땐 그 작은 동심원 안쪽이 이미 폐허였다. 원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타인이 너무 많았던 하루였다. 하나같이 엉망이었다. 다시 휴대전화가 반짝였을 땐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더 이상의 타인은 거부하고 싶었지만…. “오늘, 잘 하고 있어요? 밥은 먹었어?” “오늘 좀 엉망. 그러고보니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네. 슥 걸어가서 김밥 한 줄 사올까봐.”“그랬구나, 좋은 생각. 챙겨 먹어요. 배고프면 괜히 더 안 좋아. 일단 좀 먹어봐요. 걷고.”기꺼이 내 곁에 있는 사람의 걱정과 조언이었다. 신기해. 어떤 타인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원래 그랬던 것처럼 곁을 내줄 수 있다. 이 사람은 내 원 안에 있는 걸까? 밖일까? 나는 당장 외투를 챙겨 입고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김밥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 다시 휴대전화가 반짝였다. “김밥 먹고 있어요? 나 잠깐 가도 돼?”“응? 당신 지금 근처에 있어요? 어딘데?”“거기 있어봐요. 잠깐만 기다려!”마지막 김밥을 먹을 때 즈음이었다. 활짝 웃으면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사람이 성큼성큼 테이블로 와서 나를 덮듯이 안아주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그 사람을 마주 않았다. 외투에 찬 공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오늘 힘들었지? 나가자, 아이스크림 사줄게. 오늘 하루 아직 많이 남아있어요.”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시간은 어쩌면 이렇게 딱 맞췄는지 모르는 채 나는 녹듯이 기뻐했다. 연애의 어떤 순간 우리는 서로, 순식간에 아이가 되고 말았다. 좀 민망하지만 기꺼이 즐기고 싶은 마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맙고 달콤한 한 때. 식당 건너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세 가지 맛을 골라 담고 우리는 곧 헤어졌다. 저녁에는 각자의 일과 약속이 있어서였다. 그동안 짧고 성급한 겨울해는 다 지고 없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바스락’, 분홍색 아이스크림 봉투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