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도 강아지를 키워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쓸쓸한 퇴근길을 외롭지 않게 반겨주는 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상상. 하지만 생명체를 키우는 일은 막중한 책임감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임을 알기에 곧장 마음을 접곤 한다. 최근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도 늘어나는 추세다. 강아지와 고양이 이야기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 이들, 일명 ‘도그맘’과 ‘캣맘’으로 불리는 이들은 반려동물의 일거수일투족을 SNS에 기록하고 공유한다. 때로는 자신의 안위보다 반려동물의 존재를 우선순위에 두기도(집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얘기는 아닐 것) 한다. 주인의 사랑을 양분 삼아 자라는 수많은 반려동물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한 일상을 보내는 존재들이 있다. 칼 라거펠트, 니콜라 제스키에르, 킴 존스 등 스타 디자이너의 반려동물들이 바로 그 주인공. 패션 펫(Fashion Pet)이라 불리는 이들은 SNS에 사진이 업로드됨과 동시에 수천 개의 ‘좋아요’와 댓글은 기본이고, 누구보다 먼저 신상품을 접하며 집사(디자이너)들의 아틀리에를 제집 드나들 듯 자유롭게 활보한다. 나오미 캠벨, 스텔라 맥스웰 등 전설적인 톱 모델을 동네 친구로 삼는 인맥의 스케일이라니!
킴 존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패션 펫의 신흥 강자 ‘쿠키’.
안토니 바카렐로의 반려견 ‘니노’는 엉뚱한 매력으로 ‘좋아요’를 부른다.
루이 비통 ‘캣토그램’ 컬렉션의 영감이 된 그레이스 코딩턴의 반려묘 ‘펌킨’.
수많은 패피가 동경하는 삶이 이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 셈. 디올 맨의 아티스틱 디렉터 킴 존스의 반려견 쿠키는 패션 펫 월드에 혜성처럼 등장한 루키다. 영롱한 눈동자를 지닌 이 블랙 포메라니안은 매일 아침 방돔 광장을 바라보며 출근하고, 사무실 한쪽에 자리를 잡은 뒤 디자인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디올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보다 한 발 앞서 신제품을 소개하는가 하면, 요즘 없어서 못 판다는 ‘ABCDior’ 백도 쿠키에게는 그저 이동수단에 불과하다. 안토니 바카렐로 역시 소문난 애견가. 평소 시크함이 묻어나는 생 로랑의 룩처럼 디자이너로서의 그는 항상 날이 서 있지만, 반려견 니노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다정하다. 런웨이에 등장할 법한 강렬한 주얼 장식의 가면을 쓴 니노의 모습은 그저 바라만 봐도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직업적 장기를 적극적으로 발휘해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루이 비통의 여성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평소 ‘#achilemydog’라는 고유의 해시태그를 만들 정도로 반려견 레옹과 아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의 SNS 계정에 레옹, 아실과 보내는 행복한 일상을 공유해 오던 그는 소문난 애묘가 그레이스 코딩턴과 손잡고 ‘캣토그램’ 컬렉션을 깜짝 발표했다. 그레이스 코딩턴의 반려묘 펌킨과 블랭킷, 제스키에르의 반려견 레옹이 하우스의 아이코닉한 아이템 위에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수놓인 것! 2018년 5월 프랑스 남부에서 열린 ‘루이 비통 2019 크루즈 컬렉션’에서 첫 공개된 캣토그램 컬렉션은 곧바로 타임라인을 물들이며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톰 브라운의 ‘헥터’ 백 역시 반려견에 대한 디자이너의 애정의 산물! “컬렉션의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개들의 행복이 더 우선입니다!”라며 애견가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세컨드 브랜드 론칭 당시 자신이 기르던 반려견 ‘올리버(Oliver)’의 이름을 따 상표명을 짓기도 했다. 이외에도 반려동물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보온성을 강조한 옷을 중심으로 한 몽클레르의 ‘폴도 도그 쿠튀르’ 컬렉션 등 디자이너들의 펫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루이 비통 백을 장난감 삼아 놀고 있는 ‘아실’.
반려견들의 따뜻한 겨울을 위한 몽클레르의 ‘폴도 도그 쿠튀르’ 컬렉션.
좋은 동반자 혹은 영감을 주는 존재를 넘어 반려동물이 주체가 되어 패션 신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SNS 계정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칼 라거펠트의 반려묘 슈페트는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의 팔로어 수만 해도 20만 명을 거뜬히 넘기는 거의 1세대 펫 파워 인플루언서 중 하나! 자신의 SNS 계정에 예쁘게 나온 셀카를 업로드하며 아빠 칼 라거펠트에게 대놓고 용돈을 달라고 조른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부잣집 철부지 아가씨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아빠로 둔 그녀는 자연스럽게 기른 안목으로 사람들에게 스타일링 팁을 제안하는가 하면, 지난 2014년에는 슈에무라와 함께 ‘슈페트’ 컬렉션을 론칭해 뷰티 모델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독일 자동차 복스홀의 모델로도 기용되는 등 패션 펫으로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슈페트가 벌어들인 한 해 수익만 약 35억 원에 달한다고. 이쯤 되면 하나의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평소 마크 제이콥스가 아들이라고 칭하는 그의 반려견 네빌 제이콥스는 <러브> 매거진의 온라인 게스트 에디터로 콘텐츠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아카이브 북을 보며 자료를 찾고, 재봉틀 앞에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컬렉션을 고민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마크 제이콥스). 1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는 톰 브라운의 반려견 헥터 브라운 역시 SNS에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며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한다(헥터는 톰 브라운 컬렉션을 데일리 룩으로 입기도!). 이쯤에서 드는 한 가지 의문점. 디자이너들의 반려동물 사랑이 유독 남다른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톰 브라운이 한 말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이 저처럼 행복해하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헥터와 함께하는 순간을 좀 더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었고, 그래서 헥터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게 됐죠.” 패션 디자이너들은 직업 특성상 남보다 조금 앞선 시간을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숨 막히는 그들의 일상 속에서 반려동물만큼은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며 주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디자이너들은 그들로부터 위로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아무런 계산 없이 애정을 주는 이 순수한 존재들이야말로 진정한 솔메이트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저 맹목적인 사랑을 베푸는 대상에게 우리가 사랑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