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 니콜스 백화점 앞에서 펼쳐진 여성참정권 쟁취 100주년을 기념하는 퍼포먼스.셀린의 뉴 로고와 이미지로 랩핑된 트럭이 뉴욕 시대를 돌아다녔다.때는 2주 전, 파리 출장. 높게 솟은 에펠탑과 낮은 뭉게구름이 걸려 있는 개선문, 긴 줄이 늘어선 루브르박물관을 보며 파리에 온 걸 실감했다. 오랜만이라 거리를 찬찬히 둘러봤다. 여기저기 연속적으로 붙어 있는 패션 브랜드 포스터에 시선이 꽂혔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새 시즌을 겨냥한 컨셉트가 집약된 포스터가 저마다 특색을 드러내며 거리에 이색적인 풍경을 더하고 있었다. 그중 시선이 멈춘 건 이번 2019 S/S 4대 컬렉션을 통틀어 최대 이슈로 떠오른 셀린의 뉴 포스터. ‘E′’에서 악센트를 뺀 ‘E’로 바꾸고 자간을 좁힌 셀린 로고가 새로운 셀린의 탄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거에 에디 슬리먼이 생 로랑을 맡았을 때 ‘Yves’를 삭제해 로고를 바꿨던 것처럼 셀린의 뉴 로고 포스터는 브랜드의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장치였다. 에디가 만든 ‘슬린’을 ‘셀린’으로 돌려놓고 싶었을까? 누군가 펜으로 E 위에 악센트를 그려넣은 걸 발견했다. 에디의 셀린에 반기를 드는 부정적인 흔적이지만 브랜드 이미지에 ‘반응’했다는 시선으로 접근하면 길거리를 도배한 포스터가 일으킨 효과는 확실했다.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잡음으로써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하고 ‘행동’을 끌어냈으니까. 셀린의 뉴 로고와 맨 처음 공개한 모델 이미지가 래핑된 트럭이 뉴욕의 거리를 배회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대중의 눈에 띄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리를 무대로 삼아 사람들과 소통하는 패션이 여기저기 포착되고 있다.  지난 9월, 런던 패션위크 기간 중 하비 니콜스 백화점 앞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증손녀인 헬렌 팽크허스트가 쇼윈도에 ‘스매시(Smash)’를 가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 영국 최초의 여성투표권 획득 100주년을 기념하고, 성 평등을 촉진하기 위해 1년 동안 지속되는 #BehindEveryGreatCity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과거 런던의 피카딜리 거리에서 참정권을 얻기 위해 여성운동가들이 유리창에 돌을 던져야 했던 행동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해롤드, 포트넘앤메이슨 백화점 역시 이에 동의, 여성참정권 쟁취 100주년을 기념하는 디스플레이를 쇼윈도에 장식했고 백화점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를 목격하고 인지했다. 얼마 전 디올은 서울, 파리, LA, 도쿄, 홍콩의 플래그십 스토어 외관을 포스터 콜라주로 래핑해 이목을 사로잡았는데 여기도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자신에게 맨 처음 영감을 준 1968년 5월의 페미니스트 운동 포스터를 재현한 이미지를 쇼장에 콜라주 형식으로 가득 채웠는데 그 영역을 확장해 외관을 포스터 옷으로 갈아입힌 것이다. 2017년의 단어로 꼽히는 ‘YOUTHQUAKE(젊은이의 반란)’를 비롯해 1960년대에 출시된 미스 디올 스카프 슬로건이자 이번 시즌 오프닝 룩에 등장한 ‘C’EST NON, NON, NON ET NON!(이것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리고 아니다!) 문구가 마치 표어처럼 호소력 짙게 대중의 뇌리를 강타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메시지가 담긴 여성인권 신장을 향한 목소리가 시각적 이미지로 발현돼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피드에 올리기 시작했다. 하우스 패션이 엘리트적인 콧대를 높이며 하이패션의 진입 장벽을 높인 과거에 비하면 오늘날의 럭셔리 패션이 보여주는 행보는 매우 유연하고 친근하기까지 하다. 런웨이와 리얼 웨이의 격차가 좁아지고 있는 만큼 럭셔리 패션은 더 이상 희소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중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관계’를 쌓고 브랜드 철학을 공유하길 원한다. 시각적 이미지에 반응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것도 이런 브랜드 전략을 보여주는 예다. 대중과 유리되지 않기 위한 영리한 마케팅인 것. 1968년 5월 일어난 페미니스트 운동 포스터를 재현한 이미지들로 랩핑된 디올 하우스.소니아 리키엘 거리의 탄생을 기념하며 열린 스트리트 패션쇼. 리카트로 티시와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사빌이 디자인한 버버리의 뉴 모노그램이 게릴라 형식으로 전 세계 곳곳에 등장했다. 뉴욕과 상하이에 등장한 토머스 베어와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도 그중 하나.버버리가 전 세계 곳곳에 뉴 모노그램으로 뒤덮인 공간을 게릴라 형식으로 선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리카르토 티시는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사빌과 함께 버버리 브랜드 창립자인 토머스 버버리의 이니셜인 T와 B를 조합한 모노그램 패턴을 새롭게 선보였다. 버버리에 가져온 변화를 대담하게 제시하기 위해 티시는 비밀스럽게 포장하지 않고 과감하고 공격적인 노출 전략을 세웠다. 서울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비롯해 홍콩 트램, 뉴욕 선셋 비치, 런던 블랙 캡, 상하이 토머스 베어 등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압도될 만한 시각적 비주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대중의 일상 속에 버버리의 뉴 모노그램이 들어온 것이다. 이는 ‘버버리=클래식’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Z세대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듯하다. 한 인터뷰에서 “버버리라는 브랜드에 흥미를 느꼈어요. 버버리 팬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그들이 보여준 게릴라 이벤트는 정말 쿨해요!”라며 로고 티셔츠를 입은 스무 살의 중국 학생이 상하이에 놓여 있는 버버리의 토머스 베어를 보고 이렇게 말했으니까. 뉴욕의 애스터 플레이스에 놓여 있던 상징적인 큐브를 밀어내고 토머스 베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비영리단체인 빌리지 얼라이언스(Village Alliance) 보고에 의하면 버버리는 하루에 약 5000~2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브랜드 이미지를 ‘새로 고침’하고 세대교체로 인한 잠재고객층을 확보해야 하는 관점에서는 분명 합당한 소비라 판단했을 것이다. 거리가 무대가 되어 펼쳐지는 패션 퍼포먼스를 행인들은 그저 즐기면 될 뿐이다. 얼마 전 소니아 리키엘은 철통 보안을 허물고 2019 S/S 컬렉션을 대중 앞에 공개했다. 말 그대로 길거리 한복판에서 런웨이가 펼쳐진 것. 쇼 시작 전, 파리 시장인 안 이달고(Anne Hidalgo)가 나와 마이크를 잡고 소니아 리키엘의 이름을 딴  ‘Alle′e Sonia Rykiel’ 길이 생겼다고 발표했다. 파리에서 디자이너 이름으로 거리를 명명한 건 처음 있는 사건이다. “소니아 리키엘은 우리에게 자유의 맛을 가져다준 사람으로 파리지앵 중에서도 가장 파리지앵다운 인물이었다”며 그녀를 회상했다. 성명 발표 후 소니아 리키엘 거리를 따라 쇼가 시작됐다. 좌석에 앉아 있던 관객은 물론 쇼장 너머에 서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공유했다. 패션 시장의 패러다임이 디자인에서 브랜딩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만큼 소니아 리키엘 거리의 탄생은 소니아 리키엘이란 이름 속에 담긴 패션 역사를 기억하고 체험하며, 더 멀리 나아가 다음 세대까지 경험하게 만들 것이다. 브랜드는 단순히 쇼 형식을 넘어 대중과 교류하기 위한 소통방식을 계속 넓혀왔다. 팝업, 전시, 영상 제작, 서적 발간, 컬래버레이션 등 방법에 한계는 없다. 그중 거리로 나온 패션은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를 넘어 불특정다수까지 겨냥해 폭넓은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브랜딩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대중의 시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리셋’할 수도 있다. 지금 거리를 둘러보자.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가? 디지털 세상 속에서 우리는 약간의 과장을 더하면 직사각형의 작은 프레임에 갇혀 살고 있다. 거리로 나온 패션은 평면적인 화면의 한계를 뛰어넘는 3D, 4D적인 자극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분명하고 강렬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지금 거리는 반응하고 행동하는 움직임 속에 생동감과 생명력으로 넘쳐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