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반듯하게 개켜 돌돌 만 깨끗한 팬티가 서랍 가득 쌓여 있을 때,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러닝셔츠를 새로 꺼내 머리부터 꿸 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 했다. 나는 냉장고에 신선한 식재료가 그득할 때 소확행을 느낀다. 그 식재료가 농부들이 시커먼 손으로 흙을 탈탈 털어 건네준 알록달록한 채소일 때 행복은 더욱 확실해진다. 지금 냉장고의 신선 칸에는 얼마 전에 열린 세모아 시장에서 구해온 채소들이 한가득이다. 물론 그 틈에는 대형 마트에서 사온 것들도 일부 끼여 있다. 내가 둘을 대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다르다. 마트산 식재료는 손질할 때는 자투리 부분을 과감히 버리며, 때로는 상할 때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에 반해 마켓에서 농부에게 직접 건네받은 식재료는 애지중지하며 껍질과 꼭지까지 활용할 방법을 찾는다. 여전히 숨이 붙은 생명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마트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식재료를 접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농부에게 듣다 보면 삶의 지혜와 생태 감수성이 한 뼘 확장되는 듯하다. ‘플리마켓’의 ‘플리(Flea)’는 벼룩을 뜻한다. 즉, 플리마켓은 벼룩이 나올 만큼 케케묵은 물건을 내다 파는 시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묘 구제시장, 황학동 풍물시장이 이에 해당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예술 시장이라는 뜻에서 ‘프리 마켓(Free Market)’이라는 용어도 국내에서 통용된다.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플리, 프리, 로컬 중 무엇이든 농부와 소상공인을 소비자와 연결하는 지금의 마켓 문화를 국내에 처음 정착시킨 것은 ‘마르쉐@’과 ‘띵굴시장’이다. 도시형 농부 시장인 마르쉐@에 전치사 ‘at’에 해당하는 부호가 붙는 이유는 혜화동 마로니에광장을 거점으로 하지만 어디서든 열릴 수 있다는 확장성을 담기 위해서다. 실제로 마르쉐@은 서초구청, 양재동 시민의숲, 명동성당 1898광장, 성수동 언더스탠드 에비뉴 등을 옮겨 다니며 장을 연다. 재일교포인 김수향 대표가 일본에서 원전사고를 겪은 후 우리가 먹고 쓰는 상품의 전 과정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2012년 처음 연 마르쉐@은 어느덧 6주년을 맞았다. 한편 띵굴시장은 프로 살림꾼으로 이름난 ‘띵굴마님’ 이혜선 씨가 사용하는 세간이 어디 제품인지 묻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2015년 자신이 애용하는 가게 셀러들을 한데 모아 장을 연 게 시초가 됐다. 3년 새 셀러 25명에서 200명 이상으로 몸집이 커진 띵굴시장은 마켓 특유의 분위기가 희석됐다. 하지만 키친툴, 폴라앳홈, 은곡도마, 장스목공방, 화소반 등 팬덤을 지닌 브랜드들이 앞다퉈 참여하며 기존에 없던 할인율을 제시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마켓으로 자리매김했다. 일산, 명동, 압구정동, DDP는 물론, 제주,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장을 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마켓에서 쇼핑하는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현재 도시마다 규모는 작지만 보다 더 지역에 밀착한 마켓들이 속속 열린다. 마켓 문화가 우리 일상 깊이 스며들며 마켓에서 장보는 일은 대형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을 헤매는 일과 함께 살림을 마련하는 하나의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 9월의 첫날은 하늘이 꽤 창연하고 바람이 선선한 게 제법 가을 느낌이 났다. ‘가을을 맞는 문’이라는 뜻을 지닌,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영추문과 그 맞은편에서 열리는 장을 구경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세모아시장’은 복합문화공간인 보안여관의 카페 겸 쇼룸 ‘33마켓’에서 매달 여는 농부 시장이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규모는 작으나, 마르쉐@에서 충성도 높은 고객을 거느린 셀러들이 참여한다. 마르쉐@에서 자주 마주쳤던 ‘우보농장’ 이근이 농부와 ‘청양밤아저씨’ 우제송 농부의 모습도 보였다. 노각과 수세미가 신기하여 기웃거리자, 청양밤아저씨가 능숙하게 시식용 밤을 권한다. 받아들고 어금니로 힘껏 깨물자 단물이 입 안 가득 괸다. 밤 한 봉지에 당장 필요한 생강가루를 사서 돌아서는데 남편이 눈치 없이 “감자는?” 하고 묻는다. 옆구리를 찌르며 집에 감자는 많다고 말하는 내게 밤아저씨는 “그런 감자 먹으면 못 써. 이게 아주 좋은 거여”라며 감자를 내 쪽으로 쓱 밀었다. 2kg은 족히 나갈 법한 감자 한 봉지에 2천원이라니. 차마 집에 있는 감자가 유명 파인다이닝의 셰프가 선물한 것이라고는 말 못했다. 깻잎, 차조기잎, 쑥, 조선 호박, 양파로 장바구니가 금방 담쑥해졌다. 특히 껍질이 유난히 반질반질하고 색이 선명한 양파는 보석을 캐낸 듯한 기분을 안겨줬다. 우보농장에서는 낯선 식재료의 효능을 들으며 충동 구매하듯 노각, 수세미 등을 샀다. 꼭 그 효능을 보지 않더라도 특이한 색감과 형태미에 그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눈이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득템은 부추꽃이었다. 한 단에 단돈 3000원, 꽃값 치고 싸도 너무 싸다. 나는 두 단을 구매한 후 혹여 망울진 꽃봉오리가 다칠까 하여 가방에 밑동만 넣은 채 윗동을 밖으로 늘어뜨렸다. 집에 오자마자 네덜란드의 한 플리마켓에서 사온 물병을 꺼내 부추꽃을 꽂았다. 그리고 불린 쌀에 밤을 올려 밥을 짓고, 쑥국을 끓이고, 조선호박을 채썰어 부침개를 부쳤다. 마지막으로 고기를 구워 차조기잎, 깻잎, 양파와 함께 내며 진정한 시골 밥상이라고 혼자 흐뭇하여 웃어보았다. 근래에는 그릇도 마켓에서 직접 보고 고른다. 같은 작가가 같은 물레로 성형하고 같은 가마에 구워도 그릇은 형태나 색에서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그릇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없는 이유다. 푸드 스타일리스트들이 창고를 정리하는 날이나, 라이프스타일 숍 ‘TWL’이 매년 10월 단 하루 여는 ‘만추장’을 손꼽아 기다리는 한편 일상에서는 ‘다목적시장’을 자주 찾는다. 그릇, 빈티지 소품, 의류, 베이커리, 음료, 잼, 캔들 등 서로 품목이 겹치지 않는 셀러 예닐곱 명이 이끄는 다목적시장은 연희동에서 매달 한 번 열린다. 그중 국내 작가가 만들어 정감 가는 그릇을 판매하는 ‘목련상점’을 특히 좋아해 다목적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핑계 삼아 연희동에 오른다. 내가 목련상점 매대에서 그릇을 들어 햇빛에 요리조리 비추고 손끝으로 질감을 느끼며 그 위에 담을 음식을 상상하느라 한참을 보내면 남편은 의류 매대를 기웃거리며 기다린다. 내가 살고 있는 서촌에 뿌리를 둔 향 공방 ‘페파민트’에서 만든 풀내 가득한 향수는 여름내내 나와 함께했다. 마켓에서 살림을 한둘 마련하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외식하는 횟수도 줄었다. 그전까지 식재료를 사고 버리는 행위를 별 양심의 가책 없이 반복했다면, 이제는 그 식재료가 누군가가 노력하여 일군 결실임을 알기에 이를 살뜰히 소비하고자 주방을 부지런히 가동시킨다. 어제 전을 부치고 남은 조선호박 반 토막으로 오늘은 찌개를 끓이는 식이다. 어떤 날은 새로 산 그릇을 써보고 싶어 불 앞에 서기도 한다. 마켓에서 구해온 식재료로 요리하여 손수 고른 그릇에 담으면 그 차림새도 식당 못지않게 그럴 싸하다. 남편의 귀가 시간도 그만큼 빨라졌다. 10월이면 농부 시장에는 풍년의 기운이 넘쳐나며, TWL 주차장에서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만추장이 열릴 것이다. 물론, 부산의 ‘마켓움’, 대구 ‘내리막장’, 광주 ‘곳장’, 제주도 ‘벨롱장’ ‘골목시장’,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 그리고 띵굴시장도 호일을 잡아 어김없이 열릴 테다. 하늘이 창창히 맑은 주말 오후, 나들이 길에 마켓을 찾아 지금 이 계절이 허락하는 보물을 캐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