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도 연차가 있다. 섹스의 연차가 쌓이면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수줍게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점점 더 호불호가 확고해지고 상대에게도 그걸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된다. 상대의 욕구에 맞춰주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만족스러운 쾌락이 충분한 섹스를 즐기는 여자들의 공통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원하는 것을 요구할 줄 알고 하기 싫은 것은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그게 가능해지는 순간 섹스라이프는 진화하기 시작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아니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일을 제안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덜컥 겁이 나지만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호기심 같은 것이 생겨날 수도 있다. 반듯하게 자리잡은 기준에 약간의 유연성을 가미한다면 모험의 정도를 결정하기가 쉽다. 그 정도는 해봐도 되지 않을까? 용기를 내기가 좀 더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명확한 자기 기준과 더불어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는 용기’가 좋은 섹스를 가능케 한다. 어느 순간 둘의 관계가 권태롭다고 느끼거나, 섹스 자체에 흥미가 줄어드는 시기는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 별다른 노력 없이 그런 상태가 지나가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권태야 말로 내 안의 변태를 발현시키는 기회를 삼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와는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을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를 쉽게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장소이다. 혜진에게 그런 장소는 자동차였다. 혜진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남자친구를 먼저 배려하고 싫은 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대학 시절 사귄 남자친구들은 하나같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공원의 으슥한 벤치에서 진한 스킨십을 시도한다던가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기척과 옆 방의 소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멀티방 같은 곳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의 몸을 더듬을 때가 많았다. 그런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았지만 거절의 의사를 밝히면 괜히 남자친구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기도 했고 사정은 여의치 않지만 얼마나 자기랑 단둘이 있고 싶었으면 이럴까 싶어서 이해하고 넘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남자친구들은 혜진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구만 앞세웠던 것인데 말이다. 그런 과거는 흘러가기 마련이고 혜진이나 혜진이 만나는 상대방도 이제는 섹스할 공간 때문에 고민하진 않아도 되는 입장이 되었다.안정적이고 쾌적한 공간에서 섹스를 하면서 혜진은 이상하게도 과거의 스릴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섹스 장면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지금에 와서는 흥분요소가 되어줄 것 같았다. 게다가 공간의 분리가 확실하고 밖에서 안이 잘 안 보이는 자동차라면 해볼 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과거의 일은 분명 불쾌했다. 하지만 싫을 수밖에 없는 요소, 혜진이 불안하게 느꼈던 부분을 수정해서 분명 실외지만 실내이기도 한 차 안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얘기를 상대에게 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대는 혜진이 그런 얘기를 할 때 반짝이는 눈빛을 제대로 읽은 듯 했다. 며칠 뒤 데이트를 하자며 혜진을 데리러 온 상대의 차는 그 전보다 썬팅이 좀 더 진해져 있었다. 상대가 네비게이션에 북한산 인근을 검색하자, 혜진의 몸에도 시동이 걸리는 것 같았다. 과감하게 어떤 곳에서든 섹스가 가능할 것 같던 미영은 의외의 답을 했다. “제게 섹스는 생활이거든요. 생활이 되려면 일상공간에서 이뤄져야겠죠. 그러니 사랑을 나누기 가장 좋은 장소는 집이에요. 상대방의 집도 아닌 바로 나의 집. 익숙하기도 하고 제약이 없잖아요.”집만큼 안전하고 좋은 장소가 없다. 미영은 언제나 명쾌하게 대답을 했다. 정확하게 상대방의 집이 아니라 자신의 집이라고 한 것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남자 입장에서는 의심 받는 거니까 기분이 좀 상할 순 있겠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여자 입장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잖아요. 상대방이 자기 집에 카메라를 몰래 설치해두었으면 어떡해요.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유출되는 섹스 영상들은 여자의 동의도 받지 않고 몰래 찍은 것들이 허다하잖아요. 아무리 제가 모험심이 강하고 적극적이라고 한들, 그런 일까지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걸 방지하려면 아무래도 나의 공간이 제일 안전하죠. 게다가 아무리 그루밍을 잘 하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바디로션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도 드물고 남자들이 쓰는 샴푸향이 마음이 안 들 때도 있잖아요. 섹스가 끝난 뒤 샤워를 하는 일에서도 남자의 집보단 내가 쓰던 물건이 있는 공간이 편할 수밖에 없죠.”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서울에 올라와 홀로 자취생활을 하면서 쾌적한 자신만의 공간을 가꿔나갈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일 것이다.“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자유로운 섹스 라이프는 상상도 못했겠죠. 집이 없어서 섹스가 하고 싶을 때마다 숙박업소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면 저의 경제는 파탄 났을 테구요. 혼자 살게 된 건 제 운명에 딱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동시에 운이 좋았죠. 대학 기숙사나 고시원을 택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쾌감이 극대화된다고 말하는 미영에게 자신의 집은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최적화된 장소일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사랑을 나누는 장소 역시도 섹스를 할 때 신경 쓰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요소이기 때문에 여자가 느낄 불안을 이해하고 배려해줄 상대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기꺼이 동참해 줄 상대로. 그런 상대와 함께라면 장소는 더 이상 문제될 게 없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