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을 소비하는 건 바로 지금, 일상이지만 스타일이 창조되는 런웨이에는 ‘판타지’가 펼쳐진다. 패션은 결코 안전한 길만 모색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옷을 입고 과감하게 치장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리고 그 방식에 한계는 없다. 런웨이 위에 동화적인 순간이 펼쳐질 수도 있고, 빅토리아 시대의 한 장면처럼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눈부시게 짜릿한 잔상을 남길 수도 있으며, 전형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난 상상력으로 기괴한 반전 매력을 뽐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스타일의 한계를 넘어선 풍성함과 대담함, 긴장감은 패션 판타지가 전하는 아름다운 기교다.이번 시즌,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패션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해 재조명한 것은 맥시멀리즘이다. 사전적 정의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과장된 형태의 문화예술적 경향’. 하지만 여기서 볼드체로 표기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과장된 형태’.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된 적 없는 트렌드의 흐름은 맥시멀리즘이란 영역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볼륨감’으로 런웨이를 지배했다. 몇 시즌 전,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수장으로 등장하면서 철 지난 용어가 된 놈코어 신드롬을 맥시멀리즘 열풍으로 밀어버린 때가 있었다. 당시 맥시멀리즘은 ‘촌스럽다’와 ‘화려하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패션 월드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큼 과시적 장식주의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장식적 특징은 거들 뿐, 과장된 실루엣으로 과시적 매력을 뽐내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매출의 압박 속에 상업적 기운이 휘몰아치는 지금, 거대한 부피를 앞세운 트렌드라니! 팽배한 실용주의 노선을 큰 덩치로 눌러버리려는 쇄신적 전략인 걸까? 패션 공장을 거쳐 몸을 키운 맥시멀리즘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 건 발렌시아가다. 뎀나 바잘리아는 90년대 스노보더에게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그래피티 장식의 설산을 런웨이 한가운데에 옮겨놓고, 아우터웨어를 여러 벌 겹쳐 입은 듯한 레이어드 룩을 25벌이나 내보냈다. 실제로 뎀나는 겨울이면 몰아치는 혹한 속에 옷을 잔뜩 껴입어야 하는 레이어드에서 힌트를 얻었다. 쇼 후반부로 갈수록 실루엣의 부피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최대 9벌까지 겹친 룩은 맥시멀리즘 패션의 변주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사실 그의 레이어드 능력은 후디드 티셔츠와 셔츠, 스웨트셔츠를 겹쳐 입는 스타일링으로 진작에 증명된 바 있다. 하지만 이토록 극적인 순간은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늘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쇼가 끝난 후 그는 백스테이지에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티셔츠나 후디드 티셔츠만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팔기 좋은 스타일만 좇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까? 맥시멀리즘에 강수를 둔 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마크 제이콥스. “여기에 스트리트 패션의 흔적은 없습니다. 주얼 톤, 고가의 패브릭, 짙은 아이 메이크업과 네일 아트, 스테판 존스의 각 잡힌 모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접근했습니다. 모두 런웨이 의상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마크 제이콥스도 예상했을 것이다. 실용주의의 반대 노선을 택하면 얼마나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그런 상업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았다. 클로드 몬타나, 이브 생 로랑, 뮈글러 등이 80년대에 일궈낸 영광의 감동을 다시 런웨이로 불러와 극적인 화려함으로 빛났던 그때 그 시절이 부흥하길 원했다. 온몸을 덮는 길이와 파워 숄더, 과장된 액세서리로 완성된 룩은 맥시멀리즘의 파워플한 매력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일상적인 룩에 익숙해진 우리 눈을 환기해 주듯 패션 판타지가 지닌 힘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한편 마르니의 프란체스코 리소는 전임자가 구축한 풍성한 실루엣을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터틀넥 위에 롱 셔츠를 입고 커다란 케이프를 두르고 오버사이즈 팬츠를 매치한 후, 이도 모자라 포대자루처럼 커다란 마켓 백까지 들고 나온 마르니 여인. 볼륨감을 드라마틱한 수준으로 끌어올렸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Y/프로젝트 역시 극적인 볼륨을 스타일링 해법으로 찾았다. 유물로 취급받던 어그를 크게 뻥튀기해 밀레니얼 세대가 환호할 만한 생명을 불어넣었으니까. 이렇듯 거대한 실루엣은 새로운 스타일링을 탐닉하는 이들에게 창조적 자극을 남긴다.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기행이라 치부할 수 없는, 도전적비상이 남긴 흔적임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옷 입는 방식에 정답은 없다. 현실적인 옷차림은 안정적이지만 대담한 인상을 남기진 못한다. 몸을 과하게 부풀린 맥시멀리즘은 보편적인 미의 기준과 거리는 멀지만 침체된 패션 판타지에 탄력을 주는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 상식에 맞서는 대담하고 극적인 얼굴, 낯선 아름다움이 고개를 들 타이밍이다.